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Orcaleopard Jul 27. 2024

파리 올림픽 개막식

중간에 학술원에서 일본어 이름을 가진 흑인 가수가 나와서 노래를 부르고 군악대가 따라 부르면서 둘러싸는 장면이 기묘했다. 프랑스 군대는 혁명의 군대이자 또 학살하는 군대라는 강한 이중성의 표상 아래에 있다. 인도차이나에서, 알제리에서, 방데에서 가혹했던 살인마들이자, 프루동의 관이 운구될 때 군례로 전송하는, 참으로 오래된 국민의 군대. 그들이 흑인 가수 무리를 둘러싸는 것은 오래 전 아프리카에서 흑인 부락을 둘러싸고 학살하는 장면을 떠올리게 했지만, 이 시퀀스는 <평등>이라는 주제 아래 진행된 것이었고, 총 대신 군악 반주를 발사했다. 흑인 가수의 노래나 춤은 내가 보기에는 흔한 미국의 '섹시 댄스'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며, 군악대가 그것에 뒤따르는 듯한 모습은 오히려 군대에 대한 모욕으로 비치기도 했다. 그러나 원래 군인들은 '섹시 댄스'를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조직이기 때문에 또 verite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한편 그것은 오늘날 서구 군대의 실상을 보여주는 것인데, 마치 가수들의 세계가 그렇듯이, 군인들의 세계도 완전히 자본주의와 귀족성의 결합으로 환원된 것이 서구 모병제의 실상이기 때문이다. 더 이상 국민군도 아닌 것들이, 과거의 영광스러운 국민군의 의장을 탈취하여, 조롱하고 있다. 그것이 마크롱의 <축제>라는 것.


송승환 해설이 누벨바그 얘기하는 것처럼, 또 다른 사람이 빅토르 위고를 얘기하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프랑스의 19세기와 20세기가 좀 더 나오기를 바랐을 것이다. 장 르누아르, 알랑 들롱, 트뤼포, 싸르트르부터 들뢰즈까지, 또 고다르와 앙리 베르누이와... 대신에 미니언즈가 등장하는 것이 새로운 문명의 표준.


낭만주의는 극복되고 있는 것일까? 브레이킹 댄스와 오페라 가수를 겸업하는 젊은 청년의 아름다운 옆 얼굴. 김또가 언젠가, 올림픽 같은 건 군사정권이 훨씬 잘 한다, 88때는 그래서 잘 됐고, 평창은 그래서 지리멸렬했다는 아버님의 얘길 전해준 적이 있다. 그렇게 보면, 최근 일련의 올림픽 개막식들이 죄다 지리멸렬한 것은 군사정권이 아니어서 그런 것일 수 있다. 국가가 힘이 없고 자본이 힘이 세지면, 올림픽은 자본주의 문화의 열화판이 되어버리고 만다. 파리 개막식에서 나오는 춤과 노래는 그냥 유투브에서 찾아보거나, 아니면 슈퍼볼 공연에서 보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게 된다.  

애펠탑의 레이저쇼를 오이도나 광안대교에 빗대며 조롱하는 냉소적인 댓글들조차 보다 나아질 수 있는 출발점이 될 수 있음을 인정하자. 사람들이 욕하면서도 이렇게 많이 몰려서 개막식을 부리나케 돌려보고 있는 까닭 자체가, 개막식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도 욕을 하고 싶기 때문이라는 점도 인정하자. 욕설과 조롱의 창의성, 그러나 너무나도 좁고 축소된 창의성. 그것은 파리 개막식 그 자체처럼 앞가림하기에 급급한 정신의 결과이며, 앞이 가려져 있는 더듬거림이며, 우리는 계속 더듬거리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종종 산에 올라 그런 생각을 했고, 아니, 그걸 말로 하려면 바보 같지만, 그냥 계속 나아갔고, 내 몸은 내가 없이도 최선을 다했다."


 

작가의 이전글 의사와 정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