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자평전을 읽는 중이다. 아주 재미있다.
1. 주희는 몰락한 사대부의 자손이었다. 주희의 아버지는 주송朱松, 할아버지는 주삼朱森이라고 한다. 그의 조상은 원래 패현에 살다가 장강을 건너 남하, 이후 단양, 평릉, 금릉 등 동남지방에서 이리저리 이동했던 집안이다. 주희의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면 이미 고조할아버지 그 위부터 벼슬을 하지 않아서 가세가 기울었다. 대대로 유학자 집안이지만, 주희의 조부인 주삼은 말년에 도교와 불교에 빠졌던, "외물은 뜬구름 같은 것이어서 쓸데없다"고 하며 가난이나 생계에 대해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몰락한 독서인이었다. 그 아들인 주송은 명망가들을 찾아다니며 시를 팔고 돈을 빌리고 해서 가난한 입에 풀칠을 했다. 낮은 관직에 오르기도 했지만, 출세 운이 따르려고 하면 부친상이나 모친상을 겪어서 또 관직을 사양하고 상례를 치렀다. 추위와 배고픔 때문에 주희의 두 형은 요절했다. 그런 일은 흔한 일이었다. 주희가 태어난 집안은 아주 찢어지게 가난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결코 부유하지도 않았으며,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보통의 많은 백성과 그다지 큰 차이가 없었던 것 같다. 사대부 중에 이런 자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12세기 초의 일이다.
2. 주희가 태어난 당시는 전란의 시대였다. 주희가 1130년 생인데, 남송 조정이 1126년에 성립한다. 이듬해인 1127년에 금군이 대거 남하하고 1130년, 각 지역에서 떨쳐 일어난 송나라 군민의 저항에 부딪혀 북으로 후퇴한다. 반란, 군란, 정변도 끊이지 않았다. "조정에서는 관리를 파견하여 위무하고 군사 1만을 청해서 주둔시켰지만, 적은 더욱 기세등등해져서 군현을 깔보고 업신여겼다. 그러나 아무도 감히 어쩌지 못했다." 주희는 이런 상황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주송은 시를 읊어서, 유학은 쓸모 없으니 이 아이는 군역에 장정으로 보내 전쟁을 도와야겠다고, 고생스럽게 유자의 관을 다시 쓰게 하지는 않겠다고 했다가도, 전쟁을 싫어하는 자신의 마음 때문에 안타까워하는 감정을 드러냈다. 주희가 군인이 되었다면 동아시아의 역사는 달라졌을까. 아무튼 주송은 말만 그렇게 했지 사실 주희를 군인으로 키울 생각은 전혀 없었던 것 같고 오히려 열심히 자신이 배운 북송 도학을 전수했다.
3. 남송에서는 주전론과 주화론이 부딪혀서 주화론이 승리를 거두었다. 이때 주화파의 거두였던 진회는 영원한 역사의 역적이 되었다. 1139년 즈음에 화친이 성립한다. 송 태조 조광윤이 왕조를 개창한 지 180주년 되는 해였다. 금은 화친을 맺자마자 다시 남송을 공격하는데 이때 유기와 악비가 연전연승했다. "순창의 선비와 인민이 온 열성을 다해서 삶은 콩과 대나무 통, 큰 칼을 들고 안하무인의 철기병들을 죽이고 물리쳤"다고 한다. (저자의 이런 기술은 내가 주자학적 총력전에 대해 갖고 있던 이미지에 거의 부합하는 것인데 그 실상이 어땠는지 확인해보고 싶어졌다) 그러나 진회의 농간에 의해 진군을 멈추라는 명령이 내려와서 대업의 꿈은 물거품이 된다.
4. 주송은 양시의 제자인 나종언에게 배웠다. 양시는 정명도(정호)에게 배웠다. 양시가 정호에게 배우고 남쪽으로 돌아갈 때 정호는 득의만면하여 "내 도가 남쪽으로 간다!"고 말했다고 한다. 양시는 민학閩學의 개창자이다. 그러므로 이정의 낙학洛學은 양시와 나종언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주송에게 이어졌다. 그 핵심은 「중용」을 근본으로 삼아 사맹파思孟派(자사와 맹자 학파)의 내면적 자아 수양 공부를 중시한 것이다. 양시의 학맥을 도남道南학맥이라고도 하는데, 「중용」을 종지로 삼은 것이 중요하다. 호안국은 정호-양시의 계보가 <중용>을 중시했고 정이와 자신의 계보는 <춘추>를 중시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물론 주송은 춘추와 중용을 섭렵했지만 특히 중용의 성명性命 담론이 경敬, 성誠, 계신공구戒愼恐懼의 가르침을 통해 진여불성眞如佛性, 묵식좌선默識坐禪의 불교와 소통하는 교량이 되었던 점은 중요하다.
이 점을 저자는 거듭 강조한다. "중용학을 종지로 삼은 정호는 역학을 종지로 삼은 정이에 견주어 더욱 禅気를 갖추고 있었다. <중용>에 대한 정호의 비전을 얻은 양시는 불교로 유학을 해설하는 <중용의>를 썼으며, 양시 문하의 선비들은 마치 그림자가 몸을 따르듯이 <중용>을 좋아하고 또 불교의 학설을 좋아하였다. 여본중, 장구성, 진연, 이욱, 소의 같은 사람들은 모두 선을 좋아하고 불교를 좋아했던 유명한 제자들이었다. 우랑(주희)은 주송이 전수한 이정의 중용학으로부터 비교적 불교의 학설을 많이 받아들였다."
주희의 가정교육이 불교, 도교에 깊이 물들어 있었다는 점, 특히 그 할아버지의 만년이나 아버지의 학풍이 그러했다는 점은 주자학을 생각할 때 간과할 수 없는 요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