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토를 보고 그의 노래를 다시 듣는다.
레토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어떤 할아버지가 빅토르 최의 노래를 가만히 듣더니, 노래 좋은데, 진실함이 있어, 라고 말하는 장면이다. 그 장면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빅토르 최는, 대조국전쟁의 시대를 살았던 평범한 할아버지가 생각하는 진실함, 그런 종류의 진실함을 대변해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서구 록음악, 팝음악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소련의 새 시대 스틸랴기들 사이에서 빅토르 최가 돋보일 수 있도록 레토는 안배한다.
하지만 뮤직비디오에서 이소룡 흉내를 내며, 저 80년대 우리 아버지, 삼촌들이 다 그랬듯이 이소룡 흉내를 진지하게, 신나게 내며 빅토르 최는 또 무슨 생각이었을까. 어쩔 수 없이 했을까. 아니면 본인이 그런 발광을 한 번 해보고 싶었을까. 스타를 슬프게 바라볼 수 있는 것에는 오늘날 찾아보기 힘들어졌지만 과거엔 누구나 당연하게 생각했던 측면이 있다. 스타이기 때문에 관심을 받고 우상이 되고 추종하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 그것이 오히려 그를 공허하게 만들고, 그를 더욱 고독하게 만들고… 그는 자신의 자리가 여기가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빅토르 최의 자리는 담배를 피고 보드카를 깔짝이며, 담배연기 너머로 눈을 감고 그의 노래를 들어주는 할아버지의 어두운 방, 깜빡이는 전등 아래였던 것이 아닐까. 하지만 또 누가 빅토르에게 열광했던 저 스틸랴기들의 마음 속 한켠에, 눈을 감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들어앉아 있지 않다고 감히 단언할 수 있을까. 또 빅토르의 ‘진심’이 소련 곳곳으로, 눈 쌓인 시골 벽지에까지 퍼져나가기 위해서는 그가 스포트라이트 아래 서서 스타가 되어야만 했다는 곡절은 마치 공동체의 어소시에이셔니즘이 곳곳까지 퍼져나가기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정권이 모스크바라는 무대에 분장을 하고 군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공산주의의 애환과 곡절 그 자체를 체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더운데 들으니 참 좋다.
마치 철학자들처럼 음유시인 빅토르도 온갖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런 사람이 이름 없는 수많은 민중, 인류학적 연구대상들과 의외로 가장 잘 어울릴 수 있게 하는 뭔가가 있다는 것도 예사롭지는 않다. 노인들에게 잘 하는 사람은 동서고금 좋은 사람들이다. 노인들의 마음을 움직일 정도면 하여간 보통은 아니다. 2, 30년 씩 굿하는 김석출 집안 사람들도 포항 할머니들 욕 안 먹으려고 기를 쓰고 장구를 두드리는 판이다. 물론 돈과 권력이 충분히 과잉되면 노인도 수족 다루듯이 다룰 수 있다. 그때 그들은 아마 거의 노인이 아니게 되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