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지방법원. 24년 10월 22일 16시. 그날의 기록.
24년 10월 22일 16시. 000호. 법무법인 00의 연락. 나는 그 연락을 몇 주전에 받았고 당일 춘천지방법원으로 향했다.
16시의 변론기일 시간, 즉 재판시간. 미리 가있었다. 도착시간은 14시 반정도였다. 나는 전투복을 입고 갔다. 16시라는 생각에 나의 생각을 다시 정리하고 정리했다. 그것을 기록했다. 사전에 기록하여 출력한 자료를 몇 번이고 읽고 읊펐다. 나의 바람이 그저 판사에게 잘 전달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정리하고 또 정리했다.
너무 길까 싶어 줄여보고 그렇게 하자니 나의 이 심정이 잘 전달될 것 같지 않아 다시 채워 넣고 그러다 시간이 훌쩍 갔다. 그리고 긴장한 나머지 화장실에 갔다 왔다.
16시로 예정된 시간보다 10분 일찍 올라갔다. 그런데 재판이 벌써 시작되고 있었다. 나는 앞에 서 있는 안내요원의 안내를 받고 입장했다.
변호사가 나에게 재판이 16시이지만 언제 진행될지 모른다는 말이 떠올랐다. 그 말이 정확히 맞았다. 16시라고 쓰여 있는 그 시간에 시작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은 먼저 시작할 수도 있고 한참 기다려야 할 수 도 있다는 의미인데 먼저 시작되고 있었다.
추후 변호사와 소통을 해보니 내가 입장하기 약 2분 전부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약 80% 이상 참석을 했고 대부분의 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
변호사의 말대로 재판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약 15분 만에 끝났다. 몇 년간 기다렸던 이 재판이 고작 15분 만에 끝나고 그 15분의 시간으로 나의 1차 직업의 인생이 걸렸다는 것이 참 뭐라 표현해야나, 허무하기도 하고 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 선고일의 결과만이 남았다. 그 선고일은 11월 26일 14시이다. 약 한 달의 시간을 기다리고 그 결과에 귀 기울여야 한다.
승소냐, 패소냐. 흑백의 논리, 2가지 밖에 없는 중간이 없는 결론, 결과를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다. 군 생활을 계속하느냐, 아니면 강제전역을 하게 되느냐.
안내요원이 나에게 물었다. '000 씨 맞습니까?', 나는 대답했다. '네. 맞습니다.'
전투복을 입고 갔기에 대번에 알아봤을 것이다. 조용히 입장을 했고 한창 재판이 진행 중이었다. 나는 원고석에 앉았고 피고석에는 나를 집중적으로 조사를 하여 징계를 내렸던 000 사령부 법무관이 출석하여 얘기를 하고 있었다.
판사 총 3명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중에 재판장, 즉 가운데 배석한 재판장이 집중적으로 질문을 하고 언급을 했다.
재판장은 000 사령부 법무관에게 '언어적인 위반사항에 가까운 비위행위들로 중징계를 내린 사안이나 그런 사례가 있느냐.'를 중점으로 물었다.
나에게는 다행스러운 질문이었다. 보통 중징계에 해당되는 인원들은 중벌에 해당되는 잘못이 있는 이에게 주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성범죄, 성추행, 공금횡령, 탈취 또는 폭행 등등.
나는 그런 죄를 짓지는 않았다. 그런데 나를 그런 죄를 지은 사람과 동등하게 취급을 해버렸다. 법적인 언어로 사회통념에 완벽히 벗어나는 결정을 한 것이다. 도대체 그 부대는 나에게 왜 이랬을까. 아무리 내가 싫어도 그렇지. 이렇게 하는 것이 말이 되나 싶기도 하다.
재판이 끝나고 판사들이 나가자 나도 같이 일어섰다. 재판장들을 향한 존중의 마음을 표하고 싶었다.
그 후 나는 그 법무관을 쳐다보지 않았다. 솔직히 쳐다봤다간 화가 많이 날 것 같기도 했고 따질 것 같기도 한 느낌이었고 안내요원도 나를 살짝 경계한 눈치였다. 나는 그냥 1분간 서있고 생각을 하고 나왔다. 그리고 그것이 끝이었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냐고 재판장이 나에게 물었다. 나는 드릴 말씀이 있다고 말했고 내가 적어온 약 2페이지 안 되는 양의 기록을 읊펐다.
생각의 정리를 해서 인지 그리고 여러 차례 연습을 해서인지 막힘이 없었다. 그리고 나의 말을 듣고 재판장은 11월 26일 14시에 결론을 내리겠다고 말하고 나갔다.
나는 왜 이곳에 서있고 이곳에 와있나에 대해 생각을 다시 했다. 다시 할 수밖에 없었다. 감정적으로 모났던 2년 전의 사건은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자 모났던 많은 부분은 깎여져 둥그레져 있는 느낌이다. 뾰족하고 날카로웠던 감정은 생각보다 많이 사라졌지만 아직까지 의문이 남는 부분이 많고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면 답답하기 그지없다.
그래도 그나마 조금이라도 다행스러운 것은 그 당시 2년 전으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나는 비슷한 결론과 비슷한 길을 걸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주변에서는 어떤 생각을 할지 모르겠지만 우선 나 자신이 후회하지 않아 다행이다. 답답하지만 이게 '나' 인 것 같다.
감정적인 것을 많이 접고 사실과 현실을 직시하고 준비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고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지속적으로 들었다.
도착했을 때 우산을 쓰고 내렸던 내가 끝나고 나오니 우산을 쥐고 걷고 있었다. 날은 여전히 우중충하니 운전을 하고 집에 올 때 안개가 껴 답답했다.
그리고 집에 오니 아이들이 반겨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