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도시 속에서 마주친 두 인물, 재희와 흥수
대학 엠티 가는 버스를 막아서는 오토바이 한 대. 불어를 구사할 줄 알고, 자유로워 보이는 재희는 과 내에서 누구보다 눈에 띄는 존재다. 반면 흥수는 단벌의 무채색 옷만을 입고 다니는 만큼 눈에 띄지 않고, 그러기를 자처하는 인물이다. 이렇게 다른 두 존재가 서로를 필요로 한 이유는 비싼 서울 월세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는 이해자를 절실히 원했기 때문이다. 스스로 ‘미친년과 게이’라고 알리며 시작하는 이 영화는 영화 밖 사람들의 편견을 오히려 그대로 직면해 승화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평범함과 특별함의 범주가 명확히 나누어지지 않는 배경은 바로 ‘대도시’에 있다. 이 복잡다단한 대도시의 풍경은 더 많은 재희와 흥수가 살아가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영화 각본으로 각색하기 이전, 박상영 작가의 소설집 『대도시의 사랑법』의 「재희」는 많고 많은 재희와 영이들 중에서 하나일 것이다. 영화 속 재희와 흥수 또한 그러하다.
2. 재희의 이야기
재희는 데이트폭력, 성폭력, 낙태 등 여성이 겪을 수 있는 여러 폭력에 노출된다. 하지만 학교 사람, 전남자친구, 의사 등은 폭력의 결과를 순전히 재희의 잘못으로 여긴다. 그들은 재희를 ‘뻔한 애, 가슴 깐 애, 걸레’로 지정해버린다. 재희를 이해하려는 노력 없이 그녀를 그저 열등한 존재로 치부하려는 그들의 모습은 주류에서 벗어나는 사람이라면 일단 의심하거나 부정하고 보는 우리 사회의 면모이다. 그 속에서 재희라는 인물이 가진 성격은 매우 특별하다. “눈치보고 계산하고 머리 굴리지 않아. 그 시간에 연애를 하지.”라고 말하는 재희는 매순간 솔직하게 자기감정에 충실할 뿐이다. 당당하게 말하는 재희의 신념은 흥수 뿐만 아니라 관객에게도 매력적이고 사랑스럽게 다가온다.
여러 남자들과의 연애와 취업 준비 끝에 재희는 남들과 같은 직장인이 되어 있다. 공동체 직장 사회에서 흔한 블라우스와 단화를 신고 일하는 재희는 이전까지 둘러싼 오해와 소문조차 없는 사람인 것만 같다. 이 때 재희는 자신과 똑같은 옷차림의 옷을 입은 여자를 보고 씁쓸해하며 나 답지 않음을 감각한다. 전남자친구의 가스라이팅으로부터 벗어나 점차 직장생활에 적응해나가며 중심을 찾아나간다. 전남자친구가 키 커 보이지 말라며 대신 신기를 종용했던 단화를 벗고, 검은 하이힐을 신으며 직장생활을 한다. 혹은 담배를 피우며 자신들끼리만 중요한 사항을 공유했던 남성 직장인들의 사이로 유유히 걸어들어와 담배 한 개비를 물고 한 마디 하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이런 방식으로 재희는 공동체 사회에서 어떻게 나답게 살아가야 할 지를 체득해낸다.
3. “네가 너인 게 어떻게 약점일 수 있겠어.”
흥수는 재희와는 달리, 감정에 솔직하지도 사랑을 믿지도 않는다. 끌리는 사람을 마주했을 때도 다신 만나지 않을 거라며 부정할 뿐이다. 사랑은 안 하느니만 못한 것으로 여긴다. 이처럼 흥수에게 있어 사랑을 하는 행위는 사회에서 부적합하다고 낙인을 찍는 행위와 같다. 흥수는 동성을 좋아하는 게이이기 때문이다. 지칭 자체가 누군가를 향한 우스갯소리로 고정된 ‘게이’는 잘해봐야 ‘병자’로 취급된다. 이토록 사랑하길 회피했던 흥수는 어머니가 자신의 성정체성을 끝까지 ‘병’이라고 말하며 부정하려고 하자 태도를 변화한다. 그의 성정체성을, 게이임을 고한다.
<Bad girl Good girl> 노래에 맞추어 춤을 추는 흥수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게이스러운 모습’을 언뜻 재현해보는 것도 같다. 하지만 결혼식 무대 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결혼 당사자들의 행복을 바라는 목적이다. 친구 재희의 행복을 빌기 위해서 여자아이돌의 춤과 노래를 선보이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보편적인 행동인 것이다. 결혼식에 참석한 지인들이 가사를 따라 부르는 소리는 재희와 흥수를 둘러싼 편견을 함께 나누고 있는 암시이다. “춤추는 내 모습을 볼 때는 넋 놓고 봐서는/ 끝나니 손가락질하는 그 위선이 난 너무나 웃겨.”라는 대목에 맞추어 가리키는 흥수의 손가락질은 재희를 향한 세상 사람들의 위선을 대신 비웃어주기도 한다. 이 때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에 선 사람이 “게이 같다.”라는 말을 농담 삼아 사용하던 재희의 상사라는 점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퀴어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계속해서 작중 내 음성 라디오나 짧은 이미지로 언급된다. 동성애 사랑을 주 소재로 삼았음에도 한국에서 흥행을 일으켰지만, 이는 한국에서 동성애가 긍정적으로 인식된 사례는 아니었다. 서구 남성들 간 일어난 낭만화된 사랑으로 소비되었을 뿐,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배경은 한국과 다른 세계로 철저히 구분하는 것이었다.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은 익숙한 한국 대도시의 풍경을 보여주며 동성애가 환상 속 이미지에 갇히지 않도록 한다.
5. 냉동 블루베리의 맛을 곱씹다
재희가 떠난 자취방에 홀로 남은 흥수는 냉동 블루베리를 씹으며 소설을 쓴다. 이제까지 냉동 블루베리를 씹는 행동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기 위한 행동이었다. 동성애자 정체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어머니, 친구 재희의 아웃팅 등 속상하고 답답한 상황으로부터 회피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관객들은 지금의 흥수가 맛보는 냉동 블루베리의 맛은 다를 것임을 안다. ‘집착이 사랑이 아니라면 난 한 번도 사랑해 본 적이 없다.’를 첫문장으로 쓰는 흥수의 소설은 그동안 작중 내내 사랑과 연애의 감정을 부정했던 날들과 작별하고 수용하겠다는 전환점이다.
동시에 흥수가 자신의 사랑을 숨기느라 놓치고 만 사랑의 대상 수호를 다시금 이해하기 위한 시도이다. 이 복잡하고 다사다난한 대도시 속 자취방 한 칸에서 자신의 소설을 끊임없이 써내가는 일은 흥수가 새로이 ‘나’답게 살아가는 방법이다. 재희가 알려준 냉동 블루베리의 맛을 곱씹으며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 흥수는 재희에게 ‘잘 가라.’라는 말 대신 ‘잘 다녀오라’고 말할 수 있다.
editor: mi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