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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경 Feb 19. 2024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모르겠지만 일단 퇴사해도 될까

 처음엔 제법 그럴듯한 회사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지방 한구석에서 나름 번듯한 사옥이 있고, (이 동네 한정으로)나름 인지도도 있는 그나마 괜찮은 중소기업.


  그러나 엉망인 기업문화. 이면지 사용에 집착하고 인건비는 어떻게든 명분을 만들어 한 푼이라도 떼먹으려는 오너 마인드. 그야말로 법 없이도 사시는 분.

 법을 잘 지킨다는 뜻이 아닙니다. 법이 없기라도 한 듯 굴러가는 회사입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한 블랙기업에서 살아 나온 나는 이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 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던가요.



 새로 영입한 팀장이 ‘이 분야 외길 인생. 이전까지는 잊어라. 구시대적인 오너 마인드도 내가 바꿔놓겠다!’라고 선언했을 때도 사실 그다지 믿지는 않았지만요.

 ‘그렇게 법대로 해서 기업이 운영되는 줄 알아요?’라는 말도 안 되는 경영철학에 몇 번이나 깨지더니 혀를 내두르고 도망칠 줄이야.

 얼마 안 가 대다수 사업을 중단하고 회사 규모를 대폭 축소할 계획이 시작되며 사라진 팀장이 ‘가라앉는 배가 될 회사에서 누구보다 빠르게 탈출한 사람’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법 없이도 사는 오너는 사라진 팀장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우리 팀은 공중분해 되어 타 팀에 합병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한 명이 또 퇴사. 그의 업무는 제가 넘겨받게 된 것입니다.


 이제 이 회사는 직원도 없고 돈도 없습니다. 이 불경기에 힘들지 않은 중소기업이 한둘이겠냐마는 망해가는 마당에 최소한의 인건비로 최대한 뽑아먹자는 마인드가 극대화. 저는 세탁기에 물세탁하고 탈수까지 돌린 실크블라우스처럼 너덜너덜해졌습니다.

 아니, 비유가 너무 고급스럽군요. 저는 스파브랜드에서 싸게 사서 사흘 입고 찌든 때 코스로 돌린 린넨셔츠처럼 흐물흐물해져 버린 것입니다.


 가라앉는 배에서 탈출할 타이밍을 놓쳐버린 어리석은 사람. 이제 남아있는 사람들의 폭탄 돌리기가 시작되었습니다.

 “퇴사 안 할 거죠? 퇴사하면 또 사람 안 뽑아줄 테니까… 퇴사하면 안 돼요… 그 업무 나한테 올 거 같단 말이에요…”

 지독한 눈치싸움. 탈출과 버티기. 어느 쪽이 승자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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