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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고 싶었다

by 철부지곰

“못된 년, 나쁜 년, 돼먹지 못한 년”


억울한 폭언을 듣고만 있었다. 집에 와서야 참았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눈물이 그치고 나니 심장이 조여들었다. 다음 날, 정신과 약으로 간신히 잠을 이루었다. 하지만 깨어서 혼자 있을 때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들의 말을 겉으로는 부정했지만, 자아는 무너지고 있었다. 친구를 만나고 운동도 했지만, 점차 스스로 칼자루를 쥐고 가슴에 생채기를 냈다. 려면 내 손에 쥔 칼을 내려놓아야 했다. 그대신 나는 펜을 들었다. 그리고 다이소 공책을 사서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써 내려갔다.


집을 짓고 옷을 짓듯 글자를 모아 글을 지었다. 그러면서 나의 인격도 다시 지어졌다. 사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쓴 에세이가 대부분이었다. 쓴 글을 모아보니 주로 내가 가르친 학생에 관한 이야기였다. 상처투성이 어른이 순수한 아이들 속으로 숨고 싶던 것이다. 글 속의 나는 꽤 괜찮은 어른 같았다. 당연하다. 문학이라는 장르적 특성을 방패 삼아 과장과 왜곡을 곁들였으니까. 글로 만든 안전한 가옥에서 한동안 살았다. 얇고 가는 획은 생각보다 강력했다. 믿는 대로 쓰는 것이 아니라, 쓰는 대로 믿어졌다. 그리고 나쁜 년이라는 주홍 글씨는 내가 지은 글로 완전히 덮였다. 드디어 약 없이도 살 수 있게 되었다.


살아지니 꿈이 생겼다. 내 글을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꿈. 내겐 글을 쓸 흰 종이면 충분했다. 그래서 브런치 작가가 됐다. 연재를 시작하면서 매주 글을 썼다. 아니, 써버렸다. 또는 쏟아냈다는 표현이 더 맞다. 열혈 독자가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닌데, 밤을 새워도 마감일을 지켰다. 그렇게 30편을 내리쓰고 브런치북을 발간했다. 이윽고 그 내 몸에 남아있던 나쁜 액체가 글자라는 형태로 다 빠져나갔다. 마음에 품었던 독한 씨앗이 글짓기라는 화학적 과정을 거쳐 달콤하고 말랑한 열매가 된 것이다.


이제 나를 살게 해 준 브런치 북 ‘나를 키운 어린이’를 출판하는 게 꿈이다. 안타깝게도 이 책은 아픈 손가락이다.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 탈락에 이어 백여 곳의 출판사에서 연이은 퇴짜를 맞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도 꿈꾸고 있다.

신해철의 곡 ‘민물장어의 꿈’을 좋아하는 초등학교 6학년 이승준 학생은 꿈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너는 꿈이 있니? 네가 도전하고 싶은 것, 네가 하고 싶은 것. 무엇보다 네가 원하고 즐겁게 할 수 있는 모든 일. 설령 네가 그것을 이룰 수 없고, 또 이루기 어렵다 해도 네가 진정 원한다면 그것은 꿈이야.


어른들은 이런 이야기를 하지. "헛된 꿈은 버려. 넌 지금 시간을 날리고 있는 거야"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아. 헛된 꿈이라도 상상하며 시간을 즐겁게 보내는 것이 우물쭈물 죽치고 앉아 되지도 않는 문제나 푸는 것보다 1,000배는 낫다고 나는 생각해. 꿈은 이루기 위해 있는 게 아니야. 꿈을 이루기 위해 삶을 사는 것보다 꿈을 이루려고 즐겁게 노력하는 삶이 더 좋아. 열심히 너의 꿈을 즐겨 봐. 꿈은 그냥 그것대로 아름다운 것이야. 너는 꿈이 있니?


승준이의 담임 선생님인 나는 이렇게 답했다.

응, 선생님도 꿈이 있어. 문을 닫고 서재에 들어가 원목 책상에 앉아 글을 쓰는 것. 그러면서 나도 살고 남도 사는 것. 출간 작가가 되면 교보문고에서 주말 오후에 팬 사인회도 하고 강남역 9번 출구 앞 계단 광장에서 북 콘서트도 하고 싶어.


인세까지 두둑이 들어오면 전업 작가를 할 거야. 누가 알아? 브런치 10주년 팝업 전시에 소개된 이 글을 보고 출판사에서 출간 제안 메일을 보낼지. 그래서 교사이자 초짜 작가였던 조앤 롤링처럼 대박이 날지! 상상만 해도 즐겁다. 네 말처럼 우물쭈물 죽치고 앉아있지 않을게.


앉아서 글을 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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