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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솜 May 16. 2024

No worries!

아르바이트 한 번 해본적이 없는 나는 4학년 2학기만을 남겨두고 휴학을 결정했다.

오랜 시간 생각한 것도 아닌, 정말이지 급작스러운 결정이었다.

무작정 이대로 졸업하기는 너무 싫었고, 남들 다 가는 어학연수를 보내달라고 할 집안형편도 아니었다.

도피성으로 보일지라도, 도피성이 아닌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막연히 그곳에서 살아보고 싶었다.

한국이 아닌 다른 곳에서..

4학년 2학기, 그것도 학기중. 그러니까 졸업을 불과 몇달밖에 남겨두지 않은 나는

2학기의 중반이 지나가기 직전에 휴학을 결정했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될 무렵, 나는 따뜻한 여름의 나라인 호주로 떠났다.

시드니도, 브리즈번도, 멜버른도 아닌, 지금이야 한국인들에게 많이 알려졌지만,

그 당시엔 그 도시의 이름을 들으면 물음표만 되돌아왔던 그 도시로.

겁도없이 그 도시를 선택한 이유도 한국인이 많이 없지만, 그렇다고 시골도 아닌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한여름의 크리스마스가 다가올 즈음 그 도시에 도착한 나는,

그야말로 아무런 준비도 없는, 그저 커다란 짐가방만이 나의 모든 준비였던 나는

한밤중에 그 도시에 떨어졌다.

깜깜한 밤이 된 그 도시가 살짝 두려웠던 나는 공항안전요원?의 도움을 받아 택시를 잡았다.

왜인지 작은 동양여자 혼자 택시를 잡는 게 무서웠었나보다.

다짜고짜 시내에 있는 게스트하우스로 데려다 달라고 하는 동양 여자애가 아마도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 친절한 택시기사할아버지는 “시내 어디?“ 라고 차분히 물어주었고,

“음… 그냥 왔는데.. 그냥 제일 큰데요” 라고 더듬더듬 유창하지 않은 영어를 쓰는 나에게

“지금 크리스마스연휴라서 빈데가 없을텐데.. 일단 가보자” 라는 지금 생각해보면 행운중의 행운이 나에게 찾아왔다.

역시나 처음 간 곳은 빈곳이 없었고, 가방을 털레털레 들고 다시 나오는 나를 보고 할아버지가 헤드라이트를 비춰줬다.

“그것봐. 없지? 근처에 다른데로 또 가보자.”

그 근처에는 여러 게스트하우스들이 모여 있었기 때문에 나는 걸어가보면 된다고 했더니

“밤은 위험하잖아. 추가 돈은 안받을테니 괜찮다” 라며 몇몇군데를 더 돌아다녀 준 할아버지였다.

아마도 낯선 동양여자애가 이 도시에 온 걸 그렇게 반겨주었던 게 아닌가 싶다.


마지막으로 들른 곳에 다행히 빈방이 있었고,

내가 추가금을 준다고 하니 극구 받지 않으며 “메리크리스마스” 라며 홀연히 사라져버린 할아버지였다.

그렇게 난 그 낯선 도시에서 아주 따뜻한 밤을 보낼 수 있었다.


하루도 채 되지 않았지만, 좋은 기운을 듬뿍 얻은 나는 다음날 아침, 나의 워킹비자를 승인받기 위해 이민국을 찾아 나섰다.

그 땐 스마트폰도 없는 시절이었던지라, 종이 지도에 의존해서 가야 했었는데.

게스트하우스엔 관광지도 뿐이니 이민국이 표시가 되어 있을리가..

게스트하우스 직원이 표시해 준 곳으로 이리저리 종이를 돌려가며 길을 걷고 있다가 슬슬 멘붕이 오기 시작했다.

너무 뜨거운 그 곳의 햇빛과.. 처음 보는 낯선 도시의 모습과..

여긴어디… 나는누구…라며 멍하니 서있다가 안되겠다 싶어 길가는 아저씨를 불렀다.

“여기 가고싶은데.. 혹시 어디로 가면 되나요?“

“음.. 저쪽으로 가면 되는데.. 따라와”

“네????”

그 키 큰 아저씨는 길쭉한 다리로 성큼성큼 앞서 걸어나가기 시작했고, 나는 또 생각할 겨를도 없이 따라갔다.

키 큰 아저씨라 나보다 한참 앞서가도 잘 보여서 다행이다.. 라고 생각하면서도

너무 앞서가니 따라오라고 한 게 맞나..? 나 잘못 들은건가? 어떡하지.. 라는 생각이 스칠 무렵,

그 아저씨는 내가 잘 따라오는지 보려는 듯 뒤돌아보더니 나를 기다려주는 게 아닌가.

그렇게 키다리아저씨는 나를 이민국으로 안내해주며, 택시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너무나도 쿨하게 되돌아갔다

No worries!” 라며..


이민국에서 비자 승인을 받고 나와 제일 먼저 한 일은 핸드폰 개통이었다.

스마트폰이라는 건 만들어지지도 않았던 그 시절이었던지라 핸드폰 개통은 필수였다.

지금으로 치면 선불폰 개통이라고 하면 되겠다.

수많은 통신사 매장 중 워홀러들에게 인기가 많다고 들어봤던 매장에 들어가

제일 저렴한 핸드폰을 구매했다.

한국에서는 매장에서 개통까지 한번에 다 해주었지만, 여기선 왜인지 30분쯤 뒤 내가 전화를 직접 하라고 한다.

(내가 잘 못 이해한 걸 수도 있다..)

그리고 쉐어하우스를 알아봐야 했기 때문에, 인터넷 사용을 위해 도서관으로 향했다.

이제 핸드폰 사용해야 할 시간이 왔다.

쉐어하우스에 전화를 하려면 핸드폰이 되어야 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아.. 핸드폰을 새로 샀는데.. 여기로 전화를 하라고 했어요..”

더듬더듬 말하는 나에게 들려오는 건.. 샬라샬라 블라블라 어쩌고저쩌고…

큰일났다.

직원은 외국인이었다. 영어권이 아닌 외국인..

영어권 사람이 하는 말도 제대로 못 알아듣는 내가, 그것도 전화 영어를 제대로 알아 들을 수 있을리가.

나도 답답, 저사람도 답답..

거의 울기직전으로 그사람이랑 통화를 하며 알 수 없는 곳으로 (도서관 외부 어딘가쯤?) 가고 있는데

페인트칠을 하고 있는 할아버지가 계셨다.

“저.. 죄송한데.. 저 좀 도와주세요..”

“????”

“핸드폰을 구매했는데.. 저 대신 통화 좀 해주세요..”

무슨 용기였을까.

하지만 할아버지는 쿨하게 내 전화를 받아들더니 직원분과 열심히 통화를 해주셨다.

그늘도 아닌 땡볕아래에서 말이다..

“이건 너의 핸드폰번호고, 카드충전을 해야한다는구나. 그건 저기 매점에서 사면 될꺼야”

“아.. 진짜 고맙습니다!!!!” 라고 연신 굽신거리는 나에게 할아버지는

No worries!” 라며 하던 페인트칠을 다시 하셨다.


No worries!

그렇다. 그 날부터 난 이 말이 마음에 들었었다.

땡큐에는 자동적으로 따라붙던 welcome 보다는

no worries는 이정도야 뭐! 신경쓰지마! 라는 느낌 같았기 때문이다.

어감은 세상 쿨한데, 그 말을 받는 나에겐 세상 따뜻한 말이었다.

No worries!

백수가 되기로 마음 먹은 그 날부터 마음속으로 되새기는 그 말.


No worries! Don't wor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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