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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민재 Mar 09. 2024

그 애

나에겐 언제까지나.

그 애를 처음 봤을 때가 생생히 생각난다. 아무것도 익숙하지 않았던 그때 내가 그려왔던 이상형에 완벽하게 부합한 외관을 가지고 있었던 모습이었다. 체크 셔츠에 조금 뻣뻣할 정도로 경직된 자세 얇은 테의 안경에 생머리. 얘기 한 번 나눠보지 못하고 한 학기가 지났고 강렬한 첫인상보다 내가 쳐내야 하는 새로운 생활은 그 자체로도 벅차서 첫 번째 여름방학 때는 걔를 완전히 까먹었다.


2학기 개강을 하고 어쩌다가 조별과제의 팀장을 맡게 되었다. 두 명 정도가 모자라서 팀원 충원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고민을 하던 중 때마침 그 애에게 연락이 왔다. 공손하고 예의바른. 마치 한 번도 굽혀보지 않은 바른 그의 척추처럼 흠 잡을 데 없는 문장이었다. 팀원으로 함께해도 되겠냐는 물음에 간단한 상의 후 바로 같은 조가 되었다. 1학년 2학기.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닥치는 대로 과제를 할 때 그나마 조금 더 알고 있던 내가 리더가 되어 별 것 아닌 것들을 가르쳐 주기 시작했고, 영화 쪽에 관심이 많던 그 애는 나를 교보재로 삼았는지 질문도 하고 말도 붙이며 친해지기 시작했다. 활달하고 말이 많은 나와 다르게 사람을 대하는 게 왠지 모르게 어색해 보였던 그 애는 겉으로 보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알수록 첫인상과 비슷한, 투명한 그 애를 보면서 호감은 더욱 깊어졌다. 과제를 핑계로 붙어있는 시간이 더 길어질수록 짜증은 커녕 두 볼에 열이 올랐다. 학교와 자취방이 한 시간 반 거리였는데도 학교를 올 때는 그 애를 볼 생각에 설렜고, 갈 때는 내일 또 볼 생각에 설렜다. 기나긴 이동들에 사랑이 더해지자 상상은 깊어지고 그때 듣던 노래들엔 자연스레 이유가 붙여져 더 몰입할 수 있게 되었다. 1학년이라서 수업이 많았다. 학교 외부에서 만나기 시작하면서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도 생겼고 자연스레 밖에서 약속을 잡게 되었다. 처음엔 넷이서, 그 다음엔 셋이서. 알게 된 지 6개월 쯤 되어선 둘이서 서울 곳곳을 쏘다녔다. 약속을 잡기 위해서. 들뜬 마음을 진정하고 싶어서. 수업이 없을 때 조금이나마 닿고 싶어서 보냈던 톡들이 점점 쌓여가고 맨 처음 그 애가 나에게 보냈던 톡을 찾기가 어려워질 만큼 시간이 흘렀을 때 나는 노트를 한 권 샀다. 나는 그 애의 단정한 문장이 좋았다. 아끼는 책들의 모든 문장들을 필사하고 싶은 사람이 된 심정으로 나는 기억에 남는 문장들을 노트에 한 자씩 옮겨적었다. 그때는 그렇게 할 만큼 에너지가 남아돌았다. 고등학교 친구 Y와는 그 애에 대해서 계속해서 말해도 지루하지 않을 정도로 빛바랜 새벽들을 몇 주간 보냈다.

처음 누군가를 좋아해봐서 그 다음 단계를 몰랐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Y는 나에게 너는 계속 그 애랑 친구를 하고 싶은 거냐고 물었다. 나는 방학이 되면 만나서 고백하리라 다짐했다. 착각이 깊어질 대로 깊어져서 그랬던가. 그때쯤 되어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던 걔의 감정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던 것 같다. 터질 것 같은 마음을 말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목이 타고 있었다. 그러다가 독감에 걸렸다. 만나자고 했던 약속이 일주일 미뤄졌다. 일주일을 앓고 나서 그 애에게 걱정하는 식의 톡이 여러 개 왔었다. 그 연락들을 가만히 읽어보고 나서 생각했다. 말을 해도 되겠구나.


2월의 하늘공원은 너무 추웠다. 갈대가 무성하고 고도가 높은 그곳에서는 서울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노을이 지기 시작하고 하늘이 파래질 무렵 나는 할 말이 있다며 시간을 끌었다. 서로의 사진을 계속 찍어주다가 타이밍을 놓쳤는데 곧 해가 질 것 같아서 마음이 조급해졌다. 로맨틱한 장소라고 해서 골랐던 곳인데 로맨틱해지기엔 우린 너무 어렸고 바람은 생각보다 많이 불었다. 걔가 나에게 무슨 말을 할려고 그렇게 뜸을 들이냐고 했을 때부터 나는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패딩에 붙은 모자를 쓰고 나는 의미 없는 넋두리로 갈무리한 후 일단 내려가자고 했다. 너무 춥다고. 내려가는 내내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생각하느라 올라갈 땐 멀었던 길이 정말 짧게 느껴졌다. 날씨가 분명 추웠는데 그때부턴 추웠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월드컵대교를 마주하고 정신없이 사진을 찍었다. 고백도 고백이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대교를 본 건 처음이라 걔를 세워놓고 사진을 찍어주고 나도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다. 딴 말을 하면서 주의를 돌리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오래가지 않아 걔가 물었다. 할 말이 뭐냐고.

나로 시작한 음절은 좋아해로 끝이 났다. 내가 어떤 정신으로 그 문장을 내뱉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너무 추워서 정신이 얼어버린 건지도 모르지. 그 애는 한참 동안 대답이 없었다. 아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 나는 걔가 같은 마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먼저 무거운 주제를 꺼낸 사람의 의무감(?)으로 그 전과 나를 똑같이 대해달라. 답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로 마무리했다. 그제서야 긴장이 풀렸는지 아님 예상 밖의 고백에 기분이 풀렸는지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그 애. 타이밍을 놓쳐버려서 사위가 어두워져 나는 내 고백을 받았을 때의 그 애의 표정을 아직도 모른다. 그렇게 내 첫 고백은 조금 허무하게 끝이 났다. 긍정의 대답도 뜻밖의 키스도 없었지만.


여름이 지나고 난 후 나는 걔가 없는 학교에서 예전을 죽도록 떠올렸다. 떠올리지 않고 싶어도 그렇게 안됐다. 서울 곳곳을 쏘다녔던 것을 정말로 후회했다. 억지로 다른 사람과 약속을 잡을 때 비슷한 장소들을 다녔던 것 같다. 계절이 몇 번 바뀌고, 내가 듣는 노래들이 조금 많이 달라졌을 때 나는 그 애의 그림자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었다. K는 내가 그렇게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이젠 없을 거라고 말했다. 그 말에 쉽게 동의하지 못하는 나를 보며 아직 사랑은 끝나지 않았나 의심해본 적도 있지만 그때뿐이었다. 익숙한 교정에 새로운 사람들과 함께한 기억이 쌓이면서 졸업 할 때 쯤엔 난 거의 그 애를 생각하지 않았다.


랜덤으로 노래를 듣다가 그때 닳도록 들었던 곡과 마주쳤을 때 잊은 줄만 알았던 기억들이 다시 되살아났음에 놀란 적이 있다. 노래의 내용이 어떻든 간에 그때의 내가 아직도 내 안에 생생히 살아숨쉬는 것이 신기했다. 다시는 누구도 좋아하지 않겠다고 해놓고 그 뒤로 스쳐간 몇몇의 사람들이 떠올라서 웃기도 했다. 다만 분명한 건 나는 언제든지 그 애가 날 부르면 한 번은 돌아볼 거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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