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창작과(문창과) 출신인 게 스트레스일 때가 있었다. 특히 사회생활을 하면서 웬만하면 문창과를 나온 걸 숨기려고 했다. 발표문을 다듬는 건 기본이었고, 외화의 한글 제목이나 카피라인을 창작하기도 했었다. 업무를 맡은 것보다 힘들었던 건 사람들이 내게 갖는 기대치였다. 우려했던 것처럼 내가 낸 제목과 카피가 채택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문창과라는 꼬리표만 없었어도 이렇게 주눅 들진 않았을 텐데···. 문창과 출신이란 사실이 내 약점처럼 느껴졌다.
쉬즈 대학에서 단연 돋보이는 글린다. 예쁜 외모에 자신감도 넘치고 매우 사랑스러운 인물이다. 그녀는 마법사가 되고 싶다고 당당하게 말했지만 아쉽게도 마법에 재능은 없어 보였다. 다른 이유로 또 돋보이는 한 인물, 엘파바. 초록색 피부에 예쁘지도 않지만 쉽게 주눅 들지 않는 인물이다. 두 인물을 보면서 문득 잊고 지냈던 나의 대학시절이 떠올랐다. 문창과에는 엘파바 같은 인물이 참 많았다. 말주변도 없고 눈에 띄지도 않는데 수업시간만 되면 누구보다 빛나던 아이들. 어느 날은 꾸밀 줄도, 놀 줄도 모르는 그들이 안쓰럽다가도 교수님 앞에서 폭풍칭찬을 받는 모습을 보면 나도 모르게 질투심이 샘솟았다. 자기만의 세상이 확고한 그들이 꽤 많이 부러웠다.
글린다는 왜 재능도 없는 마법사가 되길 고집했을까? 나 또한 글쓰기에 큰 재능이 없다는 걸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중학생 때 내 팬픽을 좋아해 주던 친구들과 고등학교 시절 공부가 싫어 독서에 정을 붙이기 시작한 내 모습을 칭찬해 주었던 일본어 선생님, 그들을 만나며 꿈을 키웠다. 그만큼 타인의 인정에 목말라있었고, 그 칭찬 속에서 내 존재의 이유를 찾기도 했다. 학창시절 무엇하나 뛰어나지 않았던 내가 유일하게 주목받는 시간이 독서를 하고 글을 썼던 때니까. 이게 바로 남들이 "우와"하던 나의 문창과 진학의 실체였다.
영화 도입부에서 서쪽마녀를 처단한 글린다를 보며 마을주민들이 열광한다. 그런데 그녀의 표정이 썩 좋지만은 않다. 그때 마을주민 한 명이 글린다에게 불쑥 묻는다.
서쪽마녀와 친구였다는 게 사실인가요?
나는 문창과를 왜 그렇게 열심히 다녔을까? 비평준화 지역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는데, 내가 진학한 곳은 중학교 상위 17% 학생들만 갈 수 있는 지역 내 명문 고등학교였다. 그곳에서는 글린다 같은, 글린다를 꿈꾸는 아이들이 넘쳐났다. 누군가는 공부에 재능이 없었을 텐데도 똑같이 잘하길 바랐다. 지나친 경쟁심리로 인해 의자에 몸을 묶고 공부하는 친구도 봤다. 이곳의 소위 잘 나가는 무리 또한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의 집단이었다. 그들은 본인이 공부하고 싶을 때 누군가가 떠들면 쉬는 시간이라도 고함을 쳤다. 떠들 거면 나가라고. SKY반, 서울권반, 국립대반, 지방대반 등 수학과 영어를 까다로운 과목이라는 설명 아래 등수로 반을 나누기도 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고등학생 때 약간의 정신질환을 앓았던 거 같다. 어느 순간부터 사람이 많은 버스를 타지 못했다. 이유 없이 심장이 빨리 뛰고 가만히 있는데도 스트레스 지수가 높아졌다. 인파를 피해 등교를 하다 보니 새벽같이 학교에 가기도 했다. 몇 번 새벽에 쓰레기를 줍는 아저씨를 학교 안에서 만나기도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교장선생님이었다. "이렇게 일찍 등교해서 공부도 하고 대단하네."라고 말하던 사람이 교장선생님인 걸 알게 된 순간부터 새벽등교를 멈췄다. 그때부터 꽤 오랫동안 엄마가 차로 등하교를 시켜주었다. 불효녀가 따로 없던 시절이었다. 사람을 그렇게나 좋아하는 나지만 고등학교 동창은 유일하게 1명 있다. 그만큼 인간에게 질려버린 시절이었다.
이야기를 돌고 돌았는데, 그런 사연이 있던 내가 문창과에 갔으니 얼마나 신세계였겠는가. 아무리 공부를 열심히 해도 멋진 글을 과제로 제출하면 A+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곳이 바로 여기였다. 가끔 그들의 재능이 불공평하다고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어느 순간 그마저도 멋있어 보였다. 왜냐면, 대부분의 엘파바는 학점 같은 숫자놀이에 관심이 없었다. 그들 사이에 있으면 성적도 취업도 다른 세상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더는 인파 속에 묻히는 게 두렵지 않았다.
쉬즈 대학에서는 염소교수님이 역사를 가르쳤다. 하지만 얼마 뒤 동물의 말하는 능력이금지되며 교수자리에서 해임되었다. 엘파바는 동물차별을 극렬히 반대했고 마법을 써가면서 그들을 돕기도 했다. 글린다 또한 좋아하는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 동물차별을 반대한다며 이야기했는데, 사실 그녀는 차별과 폭력에 대해 별 생각은 없어 보였다. 마법사의 계략으로 엘파바가 원숭이 등에 날개를 돋아나게 만들었을 때도 글린다는 상황에 놀랐을 뿐 동물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은 없어 보였다. 엘파바는 마법사에게 무척 분노했고 결국 인간과 척을 지는 선택을 하게 되었다.
이제 와서 하나 고백하자면 나는 문창과 사람들을 좋아했으나 그게 내가 문창과를 좋아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내가 빛날 수 없는 곳인데 좋아할 이유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동기들 대부분은 전과 혹은 복수전공을 택하면서 학과와 멀어졌다. 그럼에도 나는 그들과 함께 하는 게 좋아서 미련하게 학과생활을 이어갔다. 3학년 때는 학생회 활동을 하기도 했고, 학과 통폐합 위기 때는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에 가입해 함께 시위하기도 했다. 누군가는 나에게 '너 정말 문창과에 진심이구나'라고 말하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함께 하는 게 좋았지 내 행동 자체에 큰 뜻은 없었다. 심지어는 '학과가 통폐합되면 취업의 문이 더 넓어지진 않을까'와 같은 이율배반적인 생각까지 했었다.
엘파바는 서쪽으로 떠나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영화로 <위키드>를 처음 접한 나로서는 아직 궁금한 것투성이다. 하지만 하나 짐작할 수 있는 건 엘파바는 대단한 마법능력 때문에 평범한 일상을 누리기 힘들 거란 사실이다. 33살의 나는 현실과 잘 타협해서 남들만큼은 살아가고 있다. 이제 더는 엘파바 같은 삶을 꿈꾸지도, 원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엘파바를 걱정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글에 매진하며 금전적으로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친구의 소식을 들으면 안쓰럽다가도 답답한 마음이 불쑥 드는, 그런 나이가 되었다. 내가 가끔 그들을 과하게 걱정하면 남편이 옆에서 그렇게 말한다.
각자 가는 길이 다를 뿐 친구라는 사실은 변함없지.
프리랜서로 전향 후 문창과 출신이라고 말하는 게 한결 편해졌다. 영상편집 업무와 문창과가 무슨 관련이 있나 싶겠지만 맞춤법을 잘 지키고 오타 하나 내지 않는 게 어느덧 나의 강점으로 자리 잡혔다. 뭐, 이건 문창과 특성보다 내 기질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언제로 가고 싶니?'라고 누가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대학교 시절을 꼽겠다. 내 삶에서 경쟁과 가장 멀었던 그 시절, 글린다가 엘파바를 꾸며준다며 푼수 떨던 그 시절, 나의 철없는 행동마저 어여쁘게 봐주었던 그들과 함께했던 그 시절이 오랜만에 아주 많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