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부연 Mar 22. 2024

06. 가장 다정한 달리기

워킹맘의 숨 쉴 시간, 달리기

작년 가을부터 미세먼지 수치가 괜찮고 바람도 세지 않은 주말이면, 열한 살 나의 딸 꽃모찌와 함께 집에서 도보 10분 거리 한강공원에 나간다. 나는 달리고 꽃모찌는 옆에서 인라인을 탄다. 함께 천천히 트랙을 돌면서 얘기를 나누고, 누가 빠른지 시합도 한다.


그곳은 대체로 평지이지만 경사가 있는 구간이 있어 8자로 트랙을 돌며 내리막길로 갔다가 반대로 경사 구간을 오르기도 한다. 의도치는 않았지만 오르막 달리기와 더불어 인터벌 트레이닝도 하는 셈이다. 내리막길에서 혹시 꽃모찌가 균형을 잃으면 내가 어떻게든 옆에서 도울 생각으로 인라인 속도에 맞춰 빠르게 달려 내려가기도 한다.      


우리는 대체로 나란히 달린다. 달릴 때 대화를 나누려면 페이스는 신경 쓰지 말고 천천히 뛰어야 한다. 평소에도 워낙 느리게 달려서 뒤에서 뛰어온 사람이 나를 앞질러 가 내 시야에서 사라지는 일이 다반사긴 하지만, 한강에서 뛰는 가장 느린 러너일지라도 달리기가 삶의 일부분으로 자리 잡은 이상 나는 러너라고 생각한다.


더욱이 꽃모찌와 함께 하는 시간에는 빨리 달리는 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말이다. 그런 마음을 가져서일까. 얘기를 나누며 다양한 방식으로 함께 달리다 보면 트랙에서도 지루한 줄 모르고 5km를 훌쩍 뛰곤 한다.     




한 번은 우리와 비슷한 모양새의 부녀인 듯한 두 사람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더니 우리를 스쳐 지나간 적이 있다. 꽃모찌 또래의 여자아이는 인라인을 타고 성인 남성은 나처럼 달리고 있었다. 어쩐지 웃음이 새어 나와 알지도 못하는 그 아빠에게 ‘아이고, 수고하십니다’ 하면서 하이파이브를 할 뻔했다. 부모로서 공감되는 수고와 더불어 러너 특유의 동지의식이 느껴졌다고나 할까. 그 후로 꽃모찌와 한강에 나갈 때마다 그 부녀가 혹시 나와 있지 않을까 은근히 찾게 되었다.     


겨울에는 한강 달리기를 잠시 중단했다가, 이제 날이 풀려 다시 시작했다. 작년까지는 속도가 비슷했는데, 올해는 꽃모찌가 인라인 수업에서 배울 건 다 배웠다더니, 정말 코너에서 아예 보이지 않을 만큼 나를 앞질러 갔다.


자신감을 얻은 꽃모찌는 요즘 태권도장에서 달리기를 많이 했다며 엄마에게 달리기 도전장을 내밀었다. 우리는 20미터 정도 되는 거리를 전력질주했다. 출발은 꽃모찌가 빠른데 달리면서 가속도가 붙은 내가 결승선에 먼저 들어갔다. 러너 엄마로서 면은 세웠다. 어쩌면 내년에는 달리기도 뒤집힐지 모르겠다. 그래도 중학교에 가면 달리기 수행 평가가 있다는데 그때가 되면 연습하는 꽃모찌 옆에서 보조를 맞추어 달려줄 수 있을 것이다.      




두 달 전 주말에 넷플릭스를 뒤지다가 애니메이션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다>를 보고, 흥미가 생겨 미우라 시온의 원작 소설을 찾아 읽게 되었다. 비전문가로 구성된 대학교 육상부 장거리 선수들이 달리기 대회에 나가기까지의 이야기로, 주인공은 최상의 재능을 타고났지만 항상 쫓기듯 훈련에 임했고, 진정한 지도자와 동료를 만나고 나서야 달리기가 대체 무엇인지 알게 된다. “달리기는 힘이다. 속도가 아니라 혼자이면서 누군가와 이어질 수 있는 강함이다.”


이 대목에서 달리면서 다른 사람과 연결되는 그런 강함이 무얼까 궁금했다. 나는 생활의 틈을 벌려 겨우 달리기를 해왔고, 러닝크루 같은 단체는 아마도 퇴직 후에나 참여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런 강함은 나와는 먼 얘기처럼 느껴졌. 우연히 쳤던 인라인 부녀도 우리와 같은 기분으로 한강을 달렸겠지만, 마음이 이어지는 것과는 다를거다.

  

가만 생각해 보면 꽃모찌와 달릴 때 우리가 연결된 느낌을 받았다. 내가 누군가와 함께 한 첫 달리기라는 의미를 넘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함께 달렸고 그 달리기로 힘이 돋았다. 잔소리는 잠깐 접어두고 순수하게 몸으로 함께 놀았다. 놀아주고 시작했는데 놀이가 되었다.


그날의 반짝이는 꽃모찌의 웃음, 바람에 부드럽게 흔들리던 나뭇가지와 햇살 같은 풍경이 마음에 잔잔하게 남아있다. 임금노동과 가사노동, 돌봄노동의 압박 속에서도 상냥함을 놓지 않게 해 줄 힘의 잔고를 쌓은 느낌이라고 할까.      


이제 나도 달리기가 대체 무엇인지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달리기는 다정함이다. 딸과 이어지는 다정한 힘이고, 지치는 날에도 그런 힘을 낼 수 있다는 걸 배우는 시간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05. 눈(雪)이 좋아질까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