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과 현실의 괴리
언젠가 봐야지, 하고 묵혀뒀던 영화 《빅피쉬》를 이제야 보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영화가 개봉할 당시와 지금의 시대상이 변해서 그런 건지 영화가 와닿기도 안 와닿기도 한 묘한 감상이 들었다. 영화에 판타지스러운 부분이 많이 들어가서 그런 건 아니다. 그러면 어째서인지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우선, 에드워드가 산드라를 보고 한눈에 반해서 대시할 때. 산드라의 감정과 입장은 무시한 채 본인의 감정만 들이미는 것 같아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아직 연애 경험, 사랑 경험이 많지 않아 치기 어린 마음에 상대방의 입장과 생각을 헤아리지 못한 채 본인의 욕구에만 집중하는 것 같았다.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는 하지만 실제로 저렇게 행동한다면 상대방은 당황스럽지 않을까? 공개 고백도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얼마나 난처할지 생각은 해봤을까? 요즘에 고백 공격이라는 말이 괜히 생겨난 게 아니다. 고백은 서로 마음이 생겼을 때 최종적으로 하는 것이다. 보면서 제발 급발진하지 말고 천천히 단계를 밟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에드워드의 사랑의 걸림돌이 산드라의 마음 자체가 아니라 라이벌인 돈 프라이스 때문이라는 것도 어쩐지 못마땅했다. 산드라가 너무 수동적으로 나온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당시 시대상을 감안하면 어쩔 수 없는 지점일지도.
두 번째, 이성을 꼬실 때 초반에만 감언이설로 꼬드기지 말았으면. 물론 에드워드는 그녀와 결혼한 이후 그녀와의 삶을 위해서 살림살이를 챙겨주며 둘의 관계에 헌신을 유지한다. 에드워드가 남편의 도리를 다하지 못했다거나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에드워드는 훌륭한 남편이었다. 다만 한 가지 첨언하자면 자원을 제공해 주는 것과 헌신을 다하는 걸 외에도 곁에서 정서적 공감과 지지를 주는 것도 그만큼 중요하다. 당연한 사실이지만 이를 간과하는 사람이 간혹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당연한 이야기지만 사귀기 시작했다고, 결혼에 골인했다고 끝이 아니다. 그때부터 시작인 것이다. 비슷한 이야기로 설렘이 끝났다고 끝이 아니다. 그때부터가 진짜 사랑의 시작이다. 설렘이 끝나더라도 상대방을 믿고 헌신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렇게 본다면 에드워드는 어찌 됐건 산드라를 최선을 다해 사랑했던 것 같다.
세 번째, 이상과 현실의 괴리. 영화에 나오는 고백을 위해 준비한 드넓은 수선화밭 혹은 고백이 담긴 구름 모양 남기기 등은 확실히 낭만적이고 로맨틱하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해야만 진정한 사랑이라는 환상을 가지게 된다면? 사랑한다면 이렇게까지 해야 한다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게 된다면? 그렇다면 아버지인 에드워드의 환상적인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 아들의 마음이 이해가 간다. 아들 윌은 아버지인 에드워드의 허풍들을 들으면서 세상은 본인이 주인공이며 본인은 어떤 어려움이라도 극복할 수 있고 그래야만 한다는 무의식적인 생각을 가지게 되었을 수 있다. 하지만 알다시피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고 본인이 주인공이 아닐 때도 있으며(심지어 자신이 빌런이 될 때도 있다!) 난관에 실패할 때도 있다. 이런 상황에 마주했을 때 윌의 마음은 어땠을까? 어쩌면 아버지의 말에 속았다는 기분이 들지 않았을까. 실패하는 나 자신도 못난 나 자신도 소중하고 가치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그는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을까? 마찬가지로 사랑에 있어서도 로맨틱한 사랑만이 진실한 사랑이라 생각하면 곤란하다. 사랑하더라도 의견 차이로 대립할 때도, 치약을 어떻게 짜는 게 좋은지와 같은 사소한 문제로 싸울 때도 있는 것이다.
영화 중에 "때로는 초라한 진실보다 환상적인 거짓이 더 나을 수도 있단다."라는 대사가 나온다. 환상적인 거짓을 만드는 게 아니라 초라한 진실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는 없는 걸까? 이미 세상의 단맛, 쓴맛, 똥맛을 겪은 사람에겐 위로의 의미로 추천하고 싶은 영화다. 하지만 아직 세상이 달다 생각하는 이에게는 별로 추천하고 싶지 않다. 후자인데 이 영화를 보았다면 중화(?)를 위해 알랭 드 보통의 《인생학교: 관계》라는 책을 읽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