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희 열사의 민주주의를 향한 몸부림
신록의 계절 5월 등굣길이 상쾌했다. 복잡하고 좁은 일방로 상가길을 지나 교문에 들어서자 봄의 생기와 활력을 보여주는 연두색, 녹색 나뭇잎들이 나를 반겼다. 눈으로 신록을 즐기고 느끼며 몇 걸음 내딛자 향기로운 아카시아꽃 향이 콧속을 맴돌았다. 기분이 좋아지며 무언가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았다. 오늘 하루 입시 준비로 고달픈 고등학교 3학년이 아닌, 자연과 함께 소녀의 감성을 맘껏 표현해 보는 하루가 되길 기대하며 교실을 향해 걸어갔다.
"승희야! 같이 가"
익숙한 목소리가 뒤에서 나를 붙잡았다. 절친 효선이었다. 미소를 가득 머금고 내 눈에 시선을 고정하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효선이는 나와 같은 반이고, 함께 목포 고교생 YMCA활동을 하고 있다. 효선이와 같이 보내는 시간도 많기도 했지만 서로의 생각과 가치관이 비슷해 친해졌다.
효선이와 오늘 하루 어떤 얘기가 오갈지 기대가 됐다. 효선이와 대화할 때면 내가 정신적으로 성숙해지는 기분이 든다.
이곳 정명여자고등학교에 나의 의지로 오지 않고 추첨에 의한 배정으로 오게 됐지만 소녀들의 여린 감성을 언제든 받아 줄 준비가 되어 있는 많은 나무가 있고, 예쁜 정원이 있고, 효선이와 같은 좋은 친구가 있는 학교에 오게 된 것이 정말 감사했다.
오전 수업을 들으며 자주 창밖을 내다봤다. 5월의 햇살이 교정을 더욱 눈부시게 했다. 날씨 만으로도 사람이 행복해지는 5월이지만, 나는 5월이면 마음 한쪽이 무거워지고 슬픔의 그림자가 따라다니는 것 같다. 1980년 5월 목포 시내에서 부서진 버스 지붕 위를 올라가 시위를 하던 사람들이 생각났고 직접 보진 않고 영상물이나 사진으로 봤던 끔찍했던 광주에서의 5.18 민주화운동이 머릿속에 떠오르기 때문이다.
수업을 듣는 둥 마는 둥 여러 가지 생각을 하다 오전 수업이 끝나고 점심시간 후 5교시 사회 수업이 시작됐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무슨 의미일까요?"
5.18 민주화운동 9주기를 맞아 계기수업을 하던 중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질문을 했다.
질문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민주주의는 독재의 반대이고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평화로운 제도인데 피하고 무슨 관계가 있을까?
나 혼자 속으로 생각하던 중 내 뒤쪽에서 자신감 없는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의미입니다."
평소 역사와 시사에 관심이 많은 효선이었다.
"맞아요. 이 말은 토머스 제퍼슨의 말로 유명한데 대부분의 국가의 민주주의는 한 번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과 희생으로 이루어진다는 의미예요"
선생님이 부연 설명을 해주셨다. 효선이가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도가 깊다는 것도 놀라웠고 민주주의의 대표적인 국가가 미국인데, 미국 사람인 토머스 제퍼슨이 저런 말을 했다는 것도 놀라웠다.
수업이 끝난 후 깊은 생각에 잠겼다. 짙은 안개가 시간이 흐르며 걷히듯 사색의 시간이 흐르며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조금씩 이해가 됐다.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운동이 없었다면, 1987년 6월 항쟁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온전한 민주주의 사회가 될 수 있었을까?
확신을 할 수 없었다. '민주주의는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구나'라는 깨달음이 나의 뇌리를 흔들었다. 민주화 운동을 위해 희생하신 분들에게 빚을 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나도 후세 세대를 위해 그 빚을 갚아야 한다고 다짐을 하게 했다.
고등학교 3학년은 입시 준비로 힘들면서도 정신없이 지나갔다. 나는 전남대학교 식품영양학과로, 효선이는 식품가공학과로 진학했다. 우리 둘은 직업의 취향도 비슷한 것 같다.
대학에서의 학과공부도 중요하지만 캠퍼스의 낭만도 중요했다. 그래서 어떤 동아리를 선택해야 할지 고민이 됐다. 캠퍼스 게시판 곳곳에 신입생을 모집하는 홍보물로 넘쳐났고 선배들이 직접 동아리 가입을 권유하기도 했다. 나와 효선이는 같은 동아리를 가기로 하고 보물찾기 하듯 곳곳에 설치된 게시판을 하나하나 다 뒤져가며 맘에 드는 동아리를 찾아다녔고 학생회관에 있는 여러 동아리방도 기웃거렸다. 그러다가 취미 동아리보다는 무엇인가 의미 있는 동아리를 하고픈 내 마음을 확 잡아당기는 동아리 홍보물을 찾았다.
'용봉'이라는 제목의 교지도 만들고 대학신문인 전대신문을 만드는 학보사였다.
지체 없이 학보사를 찾아갔고 수습기자가 됐다. 그곳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캠퍼스 곳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빨리 알 수 있었다. 나는 교내ㆍ외 집회현장을 찾아다니며 기사를 썼다. 학교 정문 앞에서 무자비하게 최루탄을 쏴대며 시위대를 때리고 붙잡아 가는 모습을 볼 때는 고등학교 때 배웠던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산다는 말이 떠올랐다. 사회정의를 위해, 독재를 비판하기 위해 고통과 두려움을 감수하며 시위하는 학생들이 존경스러웠다. 그들 때문에 민주주의가 조금씩 자라난다고 생각했다
1991년 4월 전남대 집회에서 최강일 학생이 최루탄에 맞아 실명하고, 서울 명지대에서는 강경대 학생이 백골단이 휘두른 쇠파이프를 맞아 숨지는 사건이 학보사로 알려졌다.
이 내용을 전대신문에 옮기면서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왜, 옳고 정당한 요구를 하는 사람들이 다치고 죽어야 하는가?
울분이 차 올랐다. 그냥 있을 수 없었다. 내가 조금이라도 힘이 되어 함께 싸우고 싶었다. 가장 강력한 의사표현으로 싸우고 싶었다. 분신이 생각났다. 하지만 그 방법은 너무 두려워 회피하려 했지만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더 세게 잡아당기는 고무줄처럼 분신이라는 방법을 머릿속에서 지우려고 하면 할수록 점점 더 강하게 머릿속이 아닌 마음 깊이 파고들었다.
분신을 결심하니 부모님이 생각났다. 나를 20년 동안 애지중지 키워주셨는데 효도는 못할망정 가슴에 대못을 박는 아픔을 줄 거라고 생각하니 너무 슬펐다.
생애 마지막으로 부모님과 언니 동생을 보고 싶었지만 직접 만나면 울음을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전화라도 해서 목소리만이라도 듣고 싶었다.
공중전화기 앞에 섰다. 동전을 넣고 집 전화번호 버튼을 한 자 한 자 천천히 꾹꾹 눌렀다.
"여보세요"
아버지였다.
"아빠~ 잘 있었어"
"승희구나. 나는 잘 있고 너도 공부 열심히 하고 있지!"
"네 아빠~"
울컥해서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했다
"엄마 있어요?" 감정을 추스르고 겨우 한마디 했다.
"옆에 있어 바꿔줄게"
"딸~ 밥은 잘 먹고 다니지"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니 갑자기 감정이 복받쳐 울음이 터져 나왔다. 울면서 엄마와 통화할 순 없었다. 사랑한다,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하고 아무 말도 않고 그냥 전화를 끊었다.
공중전화기 박스 안에서 한참을 목놓아 구슬프게 울었다. 마음이 너무나 아팠다.
효선에게 전화를 했다. 고등학교 사회 수업 때 들었던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을 기억하냐고 물어봤다.
"당연히 기억하지. 선생님 질문에 내가 답했잖아"
"그래 그랬었지. 네 덕분에 민주주의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보게 됐어 고마워"
"그 말하려고 전화했어?"
"응 갑자기 그때가 생각나서. 다른 볼일이 있어 끊을게"
그렇게 효선이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다. 울음이 나올 것 같아 짧게 통화한 시간이었지만 주마등처럼 효선과의 추억이 머릿속을 휘젓고 갔다. 그 추억들이 내 인생에 보석처럼 다가왔다. 순간 행복했다.
유서를 남기고 싶었다. 이 나라의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혼자만의 싸움이 아니라 함께 힘을 내어 힘차게 싸우며 전진하자고 썼다. 이 유서가 내가 죽은 후 시위현장에서 읽히고 널리 알려진다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내 피를 먹고 더 자라날 것이라는 기대감이 생겨났다.
오늘은 1991년 4월 27일이다. 지금 내가 분신을 계획하는 일이 무섭고 두렵고 걱정되고 회피하고 싶지만 이 길이 정녕 내가 가야 하는 길이라면 4월 29일 폭력정권 규탄집회에서 주저하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