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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소망 Mar 29. 2024

아버지의 서재에서

동요 파란 마음 하얀 마음을 아버지께 불러 드리며

어릴 적 아버지의 서재에는  사다리로 올라갈 수 있는 다락방이 있었다. 아버지가 책을 보시다 피곤할 때  쉬시는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이었고, 겨울철마다  이모가 보내주는 떫은 감이 홍시로 탈바꿈하는 곳이기도 했다. 나는 홍시를 먹기 위해 그곳에 갔지만 홍시가 없을 때에도 사다리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재밌어서, 그리고 서재에 있는 책을 읽으려고  갔다. 국민학생이었던  내가  읽을만한 책은 성경 이야기 그림책 1질 20권 정도가  있었고 소설책 '장발장'이 있었다. 읽을 책은 많지 않고 다락방은 자주 가다 보니  같은 책을 여러 번 읽었다. 아버지는 재에서, 나는 다락방에서 책을 읽고 있을 때면 아버지는 심심하셨는지  가끔  노래를 시켰다.  나는 다락방 사용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마음으로 노래 부르는걸 마다하지 않고 학교에서 배운 동요 '파란 마음 하얀 마음'을 불렀다.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여름엔 여름엔 파랄 거예요. 산도 들도 나무도 파란 잎으로 파랗게 파랗게  덮인 속에서 파란 하늘 보고 자라니까요'. 그 당시 아버지 나이보다 더 많은 현재의 내가 들어봐도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의 마음까지도 순수하고 깨끗하게 만드는 가사와 멜로디 같아 정말 잘 만든  동요라는 생각이 드는데, 아버지에게도 그랬는지 내가 '파란 마음 하얀 마음'노래를 불러주면 아주 좋아하셨다.

어릴 적 '파란 마음 하얀 마음' 동요를 배웠던  초등학교의 여름날 푸르른 느티나무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노래를 녹음하자고 했다. 나도 재밌을 것 같아 한다고 했는데, 막상 녹음기가 내 앞에 불쑥 들여대지니 자주 부르던 노래이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부르는 것도 아닌데 긴장도 되고  부끄럽기도 해서 잠시 머뭇거려졌다. 하지만 바로 녹음버튼은 눌러졌고 나의 노래는 시작되었다. 노래를 부를 때 약간의 긴장감이 내 속에 있었는데 그 느낌이 나도 모르게 웃음으로  나오려고 했다.  목밑까지 차오르는 웃음을 겨우 참고 1절은 다 불렀지만, 2절 초입에서 끝내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아버지도  웃으셨고 녹음은 중단되었다. 그런데 버지는 녹음을 다시 하자는 말을 하지 않으셨다. 미완성된 그 노래 녹음을  베토벤의 '미완성 교향곡'처럼 하나의 완성된  작품으로 생각하셨는지  흡족해하셨다. 그 이후  녹음된 노래는 집에서 자주 들을 수 있었는데 노래소리보다는 웃음소리를 듣기 위한 목적이 있는 것 같았다.

어릴 적 '파란 마음 하얀 마음' 동요를 배웠던 초등학교의 겨울날 하얀 느티나무

딸이 유치원 다닐 때 1년에 한 번씩 재롱잔치가 있었다. 딸이 무대에 나가 노래와 율동을 잘하고 못하고는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고 재밌었다. '부모마음은 부모가 되어봐야 안다'는 말처럼  딸을 키워보니 그 당시 아버지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아버지에게는 내가 노래를 잘 부르고 못 부르고는 중요치 않고, 단지 노래를 불러준다는 것이 좋았던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웃어버려  미완성된 나의 노래가 아버지에겐 자주 듣고 싶은 잘 완성된 노래가 된 것 같다.  천재 과학자 아인슈타인의 `내가 아무것도 바라지 않기에 행복하다'는 말처럼 버지는  내가  공부를 잘하는 것도, 노래를 잘하는 것도, 말을 잘 듣는 것도 바라지 않고 그냥 나의 존재만으로도 만족하셨던 것 같다. 그런 아버지의 마음처럼  나도 딸에게 같은 마음이다. 그래서 딸을  생각하면 그냥 고맙좋다. 


이런 마음을 갖게 해 준 아버지께 감사하다. 2024년 올해로 아버지가 천국에 가신지 30년이 되었다. 자녀들에게  줄 사랑이 많이 남았을 텐데 무엇이 그리 급하셨는지 50대 중반에  가셨다.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잔잔한 울림으로 뚜렷하게 남아 있는 건  살아생전 아버지가 보여준 사랑이  꽤 깊게 내 마음속에  박혀있기 때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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