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나의 첫 더클 빨강

빨강 하나 하기가 이렇게 힘든 거였냐고!

by 씩씩한 클라이머


1.

더클 빨간색.


클라이밍을 한두 달만 해도 여기저기에서 쉽게 보고 들을 수 있는 말이다.

그만큼 상징적인 의미가 있어서 그런 걸까?


아는 게 별로 없는 초보 시절에는 누가 "나는 더클 빨간색 정도 푼다"라거나 "더클 빨클러(더클 빨간색 난이도를 푸는 클라이머)다"라고 말하면 속으로 도대체 그게 어느 정도 난이도를 말하는 건지 궁금해하곤 했다!

서울에서 제일 체인점이 많고 방문자도 많은 더클라임(일명 더클)은 많은 암장에서 사용하는 무지개색(+검은색, 갈색 등)과는 조금 다른 난이도 체계를 사용하는데 흰색 - 주황색 - 초록색 - 파란색 - 빨간색 - 보라색 - 회색 - 갈색 - 검은색 순으로 문제가 어려워진다. 갈색과 검은색은 거의 선수들이 푸는 난이도이고 일반인은 꾸준히 운동을 한다면 보통 몇 년 안에는 보라색까지 풀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빨간색은 중급자, 보라색은 중상급자-상급자의 상징 같은 난이도가 아닌가 싶다.


나는 무지개색으로 난이도를 표시하는 암장에서 쉬운 남색을 풀 무렵에 처음으로 더클라임 일산점에 가봤는데 파란색 문제를 50% 정도 풀었던 것 같다. 같은 파란색 난이도에서도 어떤 문제는 비교적 쉽다고 느꼈고 어떤 문제는 카탈로그를 참고해서 똑같이 해보려고 해도 문제에서 요구하는 무브를 할 수가 없었다.


첫 방문 이후로 한두 달에 한 번씩 일산점을 방문했는데 지난번에는 완등하지 못했던 유형의 문제를 완등하게 된 날이나 예전에 비해 완등한 문제 수가 크게 늘었을 때는 내심 뿌듯했다. '이러다가 조금 있으면 빨간색 문제도 풀 수 있는 거 아니야?' 하면서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가지기도 했다.


그런데 몇 달 동안 다른 사람들이 '꿀빨강(빨간색 문제지만 다른 빨간색에 비해 훨씬 쉬운 문제)'이라고 부르는 문제조차도 완등하지 못하니 풀이 죽었다.


다이노만 잘하면 뒤는 엄청 쉽다길래 해봤던 문제는 다이노는 매번 성공했는데 그다음 무브가 불가능해서 괜히 다이노 연습만 열심히 한 셈이 됐다...! 발코디가 어렵고 뒤는 쉽다는 문제는 신기하게도 발코디는 다섯 번 중에 네 번을 성공했지만 발코디 다음에 토훅을 걸 수가 없어서 포기했다. 내가 아직 토훅 테크닉이 부족한 건지, 키가 커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자세로도 토훅이 정확히 걸리지가 않아서 중간 홀드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냥 포기하기는 아쉬워서 근처에 계신 강사님께 토훅을 걸지 않고 중간 홀드를 잡을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여쭤봤는데 이 문제는 무조건 토훅을 걸어야 넘어갈 수 있다고 하시길래 눈물을 머금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그 후에도 다양한 빨간색 문제 도전해 봤는데 탑 홀드 직전까지 갔다가 도저히 탑 홀드를 잡을 수가 없어서 포기한 문제들은 집에 와서도 두고두고 생각이 났다. 얼마 후면 클라이밍을 시작한 지 1년째가 되는데 아직도 빨간색 문제 하나를 완등 못할 정도면 내가 클라이밍을 정말 못하는 건 아닐까? 싶어서 조금 기운이 빠지고 속상한 날도 있었다.


2.

그러던 어느 날, 나에게도 드디어 '첫 번째 빨간색 문제 완등'이라는 행복한 순간이 찾아왔다.


인스타그램에서 다른 분이 일산점에서 등반을 하시는 영상을 보다가 문득 '이 문제는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 것이다. 스타트 부분은 루프 아래에서 시작하는 밸런스 문제인데 그렇게 어려워 보이지 않았고 그다음에 이어지는 다이노만 성공하면 탑 홀드를 쉽게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문제 하나만 보고 일산점에 방문해서 문제를 실제로 보는 순간 이건 오늘 집에 가기 전에 무조건 완등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충분히 스트레칭을 하고 지구력벽에서 워밍업을 하고 1시간 정도 파란색 문제를 풀었는데 파란색 문제가 원래 이렇게 쉬웠나? 싶을 만큼 루트 파인딩도 잘되고 쉽게 풀려서 어쩐지 예감이 좋았다. 심지어는 평소에 어려워했던 힐훅을 걸고 락오버로 넘어가는 문제도 신기할 정도로 쉽게 느껴졌다.


이쯤이면 몸이 다 풀렸다 싶어서 마음속으로 찍어둔 문제에 붙어봤다. 다른 분들의 등반 영상을 찾아보면서 머릿속으로 계속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고 가서인지 다이노 직전까지는 매끄럽게 진행이 됐는데 다이노로 잡아야 하는 홀드가 영상을 보면서 추측한 것보다 조금 더 높이 있는 게 예상치 못한 변수였다. 다행히 그동안 다이노 문제를 많이 푼 보람이 있었는지 몇 번만에 다이노에 성공해서 중간 홀드를 잡을 수 있었다. 중간 홀드도 좋고 탑 직전 홀드도 좋아서 일단 다이노에 성공하고 나니 완등까지는 일사천리였다. 탑 홀드에 합손을 했을 때 느낀 기쁨이란 말로 다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다...!


3.

언젠가 첫 번째 '더클 빨간색' 문제를 푼다면 꼭 내가 좋아하는 일산점에서 풀고 싶었고, 클라이밍을 시작한 지 1년 차가 될 무렵에는 빨간색 문제를 하나쯤은 꼭 풀고 싶었는데 소원을 완벽하게 이루게 됐다.


비록 완등 영상이 날아가서 영상을 찍으려고 같은 문제를 다시 풀기는 했지만... 재등반이라 그런지 한 번만에 매끄럽게 완등할 수 있었다. 그리고 첫 빨간색 문제 완등 후에 다른 지점도 방문을 해봤는데 빨간색 문제를 몇 개 더 완등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했다.


클라이밍을 처음 시작했을 때는 강습을 10번 넘게 듣고도 혼자 초록색 문제도 제대로 못 풀어서 15회 차까지 파란색 문제를 푸는 게 강사님이 정하신 목표였을 정도로 실력이 더디게 늘었는데, 1년 차가 된 지금은 더클에서 빨간색 문제도 만져볼 수 있게 됐다니 어쩐지 얼떨떨한 기분이다. 앞으로 빨간색 문제를 더 많이 풀 수 있게 돼도 처음으로 완등한 문제는 두고두고 생각이 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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