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에 노리가 산다.노리는 삼색 고양이다. 주로 편의점 근처에서 노숙을 하는데 그건 편의점 옆이 반찬가게인 것과 무관하지 않다. 가끔 어떤 일로 그 앞을 지나갈 때면 노리가 반찬가게 앞에서 마치 부침개처럼 몸을 이리 저리 뒤집는 모습을 볼 때가 있다. 그건 일종의 사인 같은 것인데, 나는 보지 않고도 알 수 있다. 그날 반찬가게의 오늘의 메뉴는 장조림이라는 것을. 게다가 저 작지도 않은 몸을 저렇듯 고이 접었다 펴고 다시 뒤집어 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이유도 뻔하다. 바야흐로 존재감 어필이다. 내가 여기 있다는, 오직 반찬가게 사장님을 향한 레터다. 러브레터. 운이 좋으면 고기, 평타라도 메추리알이다. 고이 접고 펴는 동작에 정성이 깃드는 이유다.
노리는 장조림도 좋아하지만 풀도 먹는다. 물론 고양이는 잡식성이니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하지만 실제로 입으로 김을 매는 고양이를 목도하는 일은 매우 흥미로운 일인 것이다. 그것도 새벽 5시에서 6시 사이, 단지 내 어린이집 앞. 그곳에 가면 새벽부터 풀을 뜯고 있는 노리를 볼 수 있다. 노리는 길고양이라 나름 팔자 좋은 집고양이들처럼 개박하나 캣 글라스, 뭐 이런 종류를 따지지 않는다. 나는 이런 노리가 인상적인데, 세상에 고양이가 좋아할만 한 더 좋은 풀들이 있다는 걸 전혀 모른다는 자세로 (매우 맛있게 먹는 걸로 보아 실제로 모른다에 한 표) 풀을 뜯는 것이다. 그저 자기 앞에 놓인 생에 성실히 입만 놀리겠다는 의지로. 그런 의지로만 본다면 노리는 약간 성자의 느낌이 있다. 얼마 전 208동 앞에서 예의 그 정성스러운 뒤집기를 시전하는 노리를 본 적이 있는데, 허리가 굽어 정면을 보아도 시선엔 땅만 보이실 것 같은 꼬부랑 할머니 한 분을 앞에 두고서였다. 그런데 할머니께서는 노리를 보고 '봉순아`라고 부르시는 게 아닌가.
옴마야~ 봉순아. 어이쿠 잘 헌다. 우리 봉수니.
그렇다, 우리가 노리라고 부른 이 길냥이의 정체는 3동 앞에서는 복실이, 8동 앞에는 봉순이, 편의점 앞에서는 노리였다. 몰긴 몰라도 누군가 어떤 이름으로 자신을 부르든 노리는 그냥 받겠다는 의지가 남다른 고양이였던 것이다. 나는 노리인데 봉순이가 웬 말이냐며, 다가온 타인의 관심을 고르지 않는다. 매우 유연하게 상황을 상황인 채로 받아, 8동의 봉수니, 3동의 복실이 편의점 앞 노리가 된다. 마치 타인의 생각엔 발톱만큼도 관심이 없다는 듯 발꼬락 사이사이를 그루밍하며, 새벽녘엔 어린이집 앞에서 풀을 뜯고 오전에는 편의점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500원짜리 츄르 낚고, 남는 시간엔 반찬가게 사장님께 레터를 쓰는 것이다. 예의 그 장조림 러브레터를.
나는 봉순이, 복실이 노리라 불리는 이 고양이의 물아일체적 성실함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남과 나의 구분 따위는 집어치우고, 그저 성실할 것. 츄르 앞에 엄숙할 것. 뒤집기는 매번 틈 없이 연습하여 어느 동 앞에서 느닷없이 엉뚱한 이름으로 불리더라도 유연하게 시전할 것. 어차피 봉순이 복실이 노리로 불리는 판에 어떤 이름으로 불려도 다 괜찮다는 저 부조리에 대한 반항적 태도. 이것이야말로 까뮈적 사고의 전형이 아닌가.
이 거대하고 무심한 냉혹의 세계에서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란 그저 매일의 반복에 대응하는 끝없는 성실함이라고 말이다. 상황은 늘 우리의 짐작을 뛰어넘고, 느닷없이 찾아오는 깊은 허무함에 대해 그것은 나의 것이 아니라고 거절할 수 없다. 내가 이 전설의 2단지 노리 봉순이 복길이에게 배운 것이 있다면 `누가 뭐라든 일단 뒤집고 본다.`이다.
거절은 없다. 뭐, 아니면 말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