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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정 Mar 02. 2024

너의 이름은 달님

평일 늦은 밤인데도 이곳엔 사람이 많다.

퇴근길에 고양이용 습식사료를 사러 들린 길이었다.

창고형 대형마트의 이 시간의 분주함이 예상 밖이다.입구에서 걸음을 멈춘다. 어디였더라. 워낙 늦은 시간이라 마감시간이 코앞이다.

빠르게 물건을 찾지 못하면 낭패인 것이다. 나는 일단 코트 위 단추 몇 개를 채운다. 긴장하면 나오는 버릇이다. 이 넓은 공간에서 참치, 그것도 고양이를 위한, 24캔짜리 습식사료를 찾는 일이란 내겐 이렇듯 긴장되는 일인 것이다. 그래도 오늘은 운이 좋은 편이다. 고양이 사료는 방문 때마다  매번 상품의 위치가 바뀌어 있는 탓에 난감했는데, 오늘은 지난번에 있었던 그 자리에 있다. 게다가 박스당 4천 원의 할인 알림이 붙었다. 4천 원이나 할인되면 몇 박스나 쟁여야 할까, 우리 집 그분께서는 한 달에 몇 캔 정도를 잡수시나. 뭐 이런 생각을 하다가 나는,  그 옆에 진열된 강아지용 간식에 눈길이 머문다. 박스에 인쇄된 푸들이 개껌을 물고 있다.회색. 실버 푸들이다.


​여느 때처럼 자전거를 타던 아침이었다. 비가 잦은 계절이라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에  일단 눈에 보이는 가장 가까운 셸터로 자전거를 끌고 들어선  참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너를 만난 순간.

뭔 개가 저렇게 크게 짖나. 첫인상이랄 게 없는 매우신랄한 포효. 주인으로 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급히 너를 안는다. 너는 계속 짖고, 비는 계속 내리는데, 뭔가가 계속되는 이 와중에  셸터 끝 가장자리에서 들어서지도 나가지도  못하는 나와 나의 자전거는 너를 등지고 서서  비를 맞는다. 반만 맞는다. 너의 레이저가 정확히 내 뒤통수에 꽂혀있다. 안 봐도 알 것 같다. 너의 거친 숨소리와 너를 달래는 주인의 당황한 숨소리가 내 귓바퀴에서 멀지 않다. 반만 맞는 비는 전부 맞는 비보다 훨씬 차갑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 후로 나는 너를 몇 번 더 보았다. 그 몇 번의 사이에  너에 대한 몇 가지 정보를 얻게  되었는데, 너는 푸들인데, 회색, 그러니까 정확히 미니어처 실버 푸들이라는 것과 그때같이 있었던 초코 푸들과 한 집에 산다는 것, 그 집에는 고양이도 두 마리나 있어서  나름 대가족이라는 것, 그리고 그중  가장 놀라운 사실은 네가 사는 곳이 204동 1102호라는 것이었다.


퇴근길, 우연히 너를 안고 선 중년의 여자를 엘리베이터에서 만나고 사람은 둘인데 한 층만 불이 들어와 있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확인하던 순간, 엘리베이터 문 앞에 코를 박고 선 내 등 뒤로 일제히 몸을 세우던 솜털들. 그제야 나는 얼마 전 새로 이사를 왔다던 옆집에 대해 아들이 지나가며 했던 말들이 생각이 났다.

‘개가 두 마리던데. 고양이도 두 마리나 키운대. 형아도 두 명이던걸.’


실버인가, 초코인가.

그 후로  나는  밤마다 침대에 누워서 듣게 되는 옆집 발 희미한 개소리의 소유주를 짐작해 보곤 했다. 어느 날은 초코 같고, 또  어느 날은 실버 같았다. 실버 같은 날은 유독 소리가 크고 길었다. 느낌이었지만, 느낌이 확신이 되고 확신이 사실이 되는 일들이 빈번한 세상이어서, 나는 딱히 확인하지 않고도 다 알아버린 것 같았다. 특히 비가 오는 밤,  확연히 들려오는 소리는  틀림없이 너의 것이었다.​


고양이용, 흰 살 참치와 게살이 들어있는. 24캔.

24캔짜리 4박스를  차에 싣고 집으로 온다. 마트에 들어서기 전 실금처럼 시작된 비는 이제 제법 무게를 가지고 떨어지고 있다. 라디오에서 비가 눈이 될지도 모른다고 했던 것 같다. 뭐가 됐든 좀 오래 내릴 거라고.

비가 오면 들리던 옆집 소리가 사라진지 정확히 8개월이 지났다. 지난봄 새로 분양받은 집으로 이사를 간다며 인사를 하던 너의 주인은 너를 안고 있었다. 팔목에 개뼈다귀가 그려진 하얀 붕대를 감고 있는 너를. 이 녀석이  우리 집 돈 먹는 어르신이라며 너스레를 떨며, 그녀는 요즘 병원에 다니는 너의 근황과 아파트 분양가와 금리에 대해 몇 마디를 더 했던 것 같다.


그렇게 나머지 봄과 하나의 여름과 가을이 가고 이제 겨울. 그리고 내가 너의 이름을 안 것은 얼마 전이었다. 카톡을 정리하다가 1102호 (푸들 2, 냥이 2) 라고 저장된 카톡 프사에서 너를 본 것이다. 너를 그렇게 부르는 것 같았다. 달님.

카톡에는

‘2012년 9월 1일~ 2023년 9월 15

‘달님아 많이 사랑한다. `라고 적혀 있었다.


​너는 오늘, 이렇게 무겁고 오래 내리는 비에도 짖지 않을 것이다.

너의 이름은 달님.

나는 너의 이름을 좀 더 일찍 알았다면 좋았겠다고 생각해 본다.

오늘은 달이 없다. 비가 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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