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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정 Mar 10. 2024

그냥 그럴거라 쉽게 생각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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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높은 곳에 있었나.

구불구불한 도로를 따라 미술관으로 오르는 길이 낯설다.실로 오래 전에 와봤던 길이긴 하나 내가 잊고 있던 것엔 이런 것들의 '경사'도 있었구나 싶은 것이다.이 도로의 기울기 따위를 잊을 만큼 지금의 나는 이곳에서 멀리 있다는 깨달음.

그 거리가 주는 생경함.

날씨 탓일 거라 짐작해 보지만.

보통 때라면 온라인 예매든 현장 예매든 표가 없어야 하는 이 전시에 표는 있고 사람은 없다.

몇 십 년 만의 한파라며 여기저기서 여러 말이 오갔는지 입장시간을 기다리며 홀을 서성이는 사람들의 옷차림이 두툼하다. 나는 딱히 여러 말을 들은 건 아니지만 발목까지 내려오는 롱패딩에, 귀달이 모자, 팔목을 안쪽까지 덮는 울 장갑까지 끼고는 자꾸 더 잊은 게 있는 사람처럼 주머니를 더듬는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받은 표를 세본다. 그러면 안심이 된다. 이 기다림의 이유나 서성임의 명분을 손에 쥔 기분. 그리고 아까부터 계속 폰을 떨어뜨리고 있는 건 아마도 장갑 탓일 거라고 생각해 본다.​


전시회는 사람이 없다고 해서 바로 입장이 가능한 건 아니어서, 나는 이미 기다리는 사람들 무리에 섞여 마치 많이 기다려본 사람처럼 각지고 익숙한 구석을 찾아 앉는다. 뒤와 옆이 안전하게 막혀있는 구석자리. 예전에 그러니까 친구였나, 선배였나 그 중 하나였을 누군가가 '구석이 안전한 이유는 '뒤나 옆을 딱히 경계하지 않아도 되는 것' 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때 우리가 진지하게 고민했던 안전이라는 게 고작 이런 구석자리에 있다는 것에 동의할 수 없었지만 묘하게도 수긍이되는 말이라고 생각했었다. 아, 그래서인가, 경계하지 않아도 되는 방향으로 생을 기대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꾸 코너로 몰리는 이유가. 뭐 이런 시답지 않은 생각들을 하며, 어쨌든 코너로 몰리지 않으려면 구석자리는 피하는 게 좋겠다 생각하곤 했다.

안에 커피숍이 없네. 그가 캔커피를 건넨다. 캔이 아직 따뜻하다. 이 시간까지 해가 들어오는 창은 분명 남쪽을 기준으로 한 서쪽 방향이라고, 겨울에 남서는 진리라며 나는 안 해도 될 말을 하며 캔을 받는다. 나는 앉았지만 그는 서 있어야 하고, 이런 류의 기다림은 분명 무료한 것이다. 여러 번 놓친 폰의 흔적과 옆과 뒤가 안전한 구석자리와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캔 커피, 그리고 남서방향의 창.

아직 우리는 더 기다려야 할 테지만. 이렇게 아직 따뜻한 걸 그러모으다 보면 어느새 거기에 가 있겠지.

아니 그냥 그럴 거라고 쉽게 생각하기로 한다.

어쨌거나 나는 앉아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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