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알리는 사람이다.
내가 이 길을 처음 걷게 된 것은 2007년, 대학교 4학년 여름, 프랑스에 다녀온 후부터였다. 물론 2007년에 바로 이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이 길에 입문하고부터 지난 시간까지 여러 운명적이면서도 필연적인 과정을 거쳐 왔다. 그리고 이 길에서 보낸 지난 16년의 시간 동안 다양한 사람들과 여러 사건들을 마주했다.
나는 2008년부터 현재까지 10개 이상의 대학과 대학원에서의 시간 강사, 다문화 센터 강사, 방과 후 사물놀이 강사, 한 학교를 이끄는 코디네이터인 책임 강사, 해외 대학의 전임 교수, 해외 파견 교원, 대기업 임직원 대상 출강 강사, 군 국가 교육 기관의 강사, 주요 대학의 객원 교수로서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알리는 사람이라면 갈 수 있는 거의 모든 길을 다양하게 걸어왔다. 그리고 나는 지금 해외 프랑스에서 이렇게 나의 시작과 끝을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내가 어떤 마음으로 '마지막'이라 말하며 이 길을 끝내려 하는지 이제는 풀어놓을 때가 된 것 같다.
나는 대학 시절 불어 불문학을 전공하고 복수 전공으로 고고문화인류학을 공부하면서 3학년 때에는 뮤지컬 배우로서 극단 생활을 병행했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글쓰기와 국어, 외국어를 좋아해서 외교관이나 교수를 꿈꿨고 춤이나 각종 운동을 좋아하고 승부욕이 강해서 다른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는 '깡'도 있었다. 음악도 좋아하고 흥이 넘쳐 합창부도 했으며 고등학생 때에는 풍물패 상쇠로서도 각종 대회를 섭렵하기도 했다.
이렇게 나는 항상 무엇인가 표현하는 것을 좋아했었다. 하고 싶은 것은 글로, 몸으로, 음악으로 표현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초등학생 때에는 하고 싶지 않았던 '수학 경시부'에 얽매여서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들을 못 하게 되는 제약도 있었다. 그리고 나는 누군가가 내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을 억지로 시킬 때에는 반항을 하기도 했다. 그게 바로 '수학 경시부'였는데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에서는 수학 경시부가 꽤 엄한 학교였다. 경시부 교실이 따로 있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 안에서 계속 수학 문제를 풀어야 했는데 나는 그게 너무 하기 싫었다. 다른 친구들은 운동회 준비도 하고 소풍도 가는데 나는 우리 반 친구들과 어울릴 시간도 없이 하루 종일 수학 경시반에서 수학 문제를 풀어야 했고 저녁에는 학원까지 다녀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수학 경시부 선생님께 수학 경시부를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그 선생은 알겠다며 나에게 우리 반 교실로 돌아가라고 말했다. 그렇게 수학 경시부를 끝낼 수 있을 줄 알고 나는 기뻐했다. 그런데 한 시간이 지나자 그 선생은 다른 학생을 시켜 나를 다시 수학 경시부 교실로 불렀다. 그러더니 나를 엎드리게 한 후, 쇠 파이프로 엉덩이를 여러 차례 때렸다. 지금 생각해도 참 어이없고 화가 난다. 요즘 학생들에게 만약 이런 체벌을 했다면 그 선생은 교사직을 그만둬야 했을 거다.
나는 체벌은 받아 본 적이 없는 모범생이었는데 그날의 충격은 아직까지도 잊지 못할 사건으로 남아 있다.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맞은 것이 화가 났고 하기 싫은 것을 계속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 후에도 그는 나를 수학 경시부에서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부모님을 설득해서 내가 꼭 수학 경시부를 해야 하는 이유를 더욱 주지시켰다. 그런 그의 행동은 나의 인생에 아주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나는 그날 이후로 수학을 놓았다. 하고 싶지 않고 흥미가 없는데 초등학생이 고등학교 과정의 수학 문제를 풀어야 하는 게 나에게는 너무 벅차고 힘든 일이었던 것 같다. 어린 나이에 얼마나 다른 친구들과 놀고 싶었을까? 그 후 나는 수포자가 되어 수학은 공부하지 않았다. 내게 수학적 머리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어릴 때에는 꽤나 수학, 과학을 잘하는 이과적 성향이 강한 아이였다. 구구단을 유치원 때 읊었고 자동차 번호판을 보면 사칙연산으로 암산하는 게 특기였으며 피타고라스 정리를 배우지 않은 상태에서 그 원리를 알아내기도 했을 정도로 탐구적인 아이였다.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나는 지극히 문과적인 사람으로 나아갔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까지 수학을 놓을 필요가 없었는데 왜 그랬을까 싶기도 하다.
이러한 일들을 통해 어릴 때부터 나는 호불호가 분명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새삼 더 느끼게 된다.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하게 되면 반항심이 생기고, 하고 싶은 것은 꼭 해야 하는 그런 기질을 타고난 아이였던 것이다.
나는 무엇인가 하나에 꽂히면 그것에 열정을 다했다. 배우고 싶은 것은 어떻게든 배워야 하는 그런 아이였던 것 같다. 초등학교 2~3학년 때 피아노가 너무 배우고 싶었는데 엄마가 학원은 '수학 경시부' 학원 하나만 다녀야 한다고 하셨기 때문에 피아노 학원에는 다닐 수가 없었다. 그때 수학 경시부 학원은 의무적으로 가야 했던 학원이었다. 학교에서 수학 경시부에 사활을 걸고 있었고 유명 학원과도 연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친구가 다니는 피아노 학원에 따라가서 학원 선생님께 우리 집에 전화해서 내가 학원에 다니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부모님께 대신 말해 주길 부탁했었다. 그리고 엄마는 학원 선생님의 전화를 받으시고 3개월만 내가 피아노 학원에 다닐 수 있게 허락해 주셨다. 그리고 나는 3개월 동안 체르니 100번 초반까지 빠르게 배웠다. 그때 혼자서 피아노를 연습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할 정도로 나는 피아노 연주에 진심이었다.
수학 경시부 때문에 다녔던 수학 학원은 경시부 학생들이 모두 다니던 학원이었는데 그 학원에 내가 안 나가고 피아노 학원에 계속 다니겠다고 하자, 수학 학원 원장 선생님은 내게 학원비를 안 내도 되니 나오라고까지 했었다. 내가 피아노 학원에 계속 다니면 수학 학원에는 못 다니게 되니 수학 학원에서는 나를 붙잡은 것이다.
결국 그렇게 나는 피아노 학원을 그만두게 되었고 지금까지도 피아노를 계속 배우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다. 너무 어렸을 때 배운 기억이라 그런지 악보를 보면서 치고 싶은 곡을 독학으로 연주하기도 하지만 꽤 오랜 시간 동안 연습해야 한 곡을 완성할 수 있는 수준 정도이다. 어릴 때 조금 더 피아노를 오랫동안 배웠더라면 지금은 능숙하게 피아노를 잘 쳤을지도 모른다.
나는 피아노를 배운 후에 바이올린이나 플루트와 같은 다른 악기도 배우고 싶었다. 하지만 음악적으로 갈 기회는 내게 오지 않았던 것 같다. 어렸을 때의 이 기억으로 나는 여전히 음악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다.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있을 때에는 꼭 배워 보고 싶은 것은 악기이다. 나는 여전히 배우고 싶고, 하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은 사람인 것 같다.
이런 나의 성장 과정을 돌이켜 보니 참 고집도 세고 배우고 싶은 것은 꼭 해야 하는 그런 아이였던 것 같다. 엄마가 학원을 하나만 다녀야 한다고 했던 이유는 분명 경제적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어느 부모가 자식이 배우고 싶다는 것을 안 가르치고 싶었을까? 자식이 배우고 싶어 하는 것을 다 가르칠 수 없었던 엄마의 마음은 어떠셨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고집도 세고 원하는 것만 하려 했던 내가 부끄러워진다.
성장 과정에서 있었던 여러 일들을 되짚어 보면 나의 성향이 어느 정도는 드러났었다고 생각한다. 평탄하게 흐르듯 지낸 듯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조금은 당돌하고 특별했던 아이였다. 내가 수학을 쉽게 버린 게 지금은 아쉽단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나의 성향이 그러한 걸 어찌할 수 있었을까?
수학은 놓았지만 그 후 나는 음악, 춤, 책, 영화 같은 것에 매력을 느꼈고 내가 매력적이라 생각한 것들을 조금씩 깊이 있게 알아갔던 것 같다. 책은 어릴 때부터 좋아했었으니 자연스레 함께했는데 언제부턴가 특히 영화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중학생 때부터는 매일 하루에 1~2편의 영화를 무턱대고 보기 시작했다. 그 시절에는 비디오테이프로 영화를 볼 수 있었는데 나는 비디오 대여점에 매일 가서 1~2편의 영화를 빌려서 봤고 폐업하는 가게에서는 비디오테이프를 사서 모으기도 했었다. 특히 내가 좋아했던 배우 심은하, 장국영 영화는 꽤 많이 수집했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일명 '영화광'이 되었다. 좋아하는 배우의 드라마나 영화는 빠뜨리지 않고 봤는데 배용준, 심은하는 내가 어릴 때부터 계속 좋아했던 배우들이었다. 드라마는 공 테이프에 녹화해서 보고 DVD가 나온 후부터는 DVD도 많이 모았던 것 같다.
책, 영화, 드라마를 보면서 삶의 희로애락을 느꼈고 그 사이 나의 감수성은 높아져 갔다. 그때의 습관이 지금도 남아있어서 나는 드라마와 영화를 가리지 않고 수시로 본다. 그래서 지금은 내가 모르는 드라마가 없을 정도이다. 특히 한국어 교육을 시작하면서부터는 수업에서 영상 속 여러 자료를 활용하기 위해 K-Drama와 K-Movie는 장르 불문하고 습관처럼 보았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매체를 활용한 한국어 교육 방안' 논문을 쓰기도 했다.
중고등학교 때 꿈이 영화평론가이기도 했었다. 영화평론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찾다가 교수와 같은 권위 있는 사람이 영화 평론도 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는 그때부터 나의 장래 희망은 교수가 되었다.
나는 중학생 때부터 국내 최고 걸그룹인 'S.E.S'를 좋아하게 되었고 특히 그들의 첫 라이브 무대를 보고 메인 보컬 '바다'에게 빠지게 되었다. 대학생이 되어서 그의 첫 작품이었던 '페퍼민트'라는 창작 뮤지컬을 처음 본 순간, 뮤지컬에도 빠져들게 되었다. 그가 하는 뮤지컬이나 공연을 보러 다니며 한창 빠져 있을 때 우연히 본 배우 모집 오디션 공고에 겁도 없이 지원하게 되었고 그렇게 우연과 필연 그 중간 어디쯤에 이끌려 배우로서의 길에도 들어서게 되었다.
청소년기에는 사춘기가 따로 없이 그렇게 지나갔던 것 같다. 무엇이든 배우는 것을 좋아했지만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몰랐던 것 말고는 큰 문제 없이 부모님 말씀도 잘 듣는 그런 청소년기를 보냈다. 다만 조금 특별한 점이라면 영화와 드라마를 많이 봐서 그런지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쉽게 잘 이해하고 파악했으며 눈치도 꽤 빠른 편이었다. 그래서 타인의 말을 잘 들어주고 그들의 슬픔에 내가 더 아파하며 공감해 줄 만큼 공감 능력이 뛰어났다.
중학교 1학년 때 국어 선생님이 반 학생들에게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냐'라는 질문에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마음'이라고 대답하기도 했었는데 국어 시간에 내 생각과 글을 눈여겨보셨던 국어 선생님이 나의 글쓰기 실력을 알아봐 주셨다. 그래서 학교 대표로 글쓰기 대회가 있을 때 나를 추천해 주셨고 '나의 주장 발표 대회'에 나가게 되어 대상도 받았다. 그리고 학교 대표로 뽑혀 시에서 운영하는 논술 교실에도 들어가는 등 글쓰기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또 나는 탈춤과 가야금도 특별 활동 시간에 배우게 되면서 우리 가락에도 점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중학교 때 과학 선생님이 사물놀이 부서를 담당하셨었는데 열정적으로 장구 치시는 모습이 너무 멋있어서 그때부터 장구에도 빠져들게 되었다.
나는 그때의 영향으로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풍물패에 들어가게 되었다. 글 쓰는 것에도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방송 작가를 하고 싶어서 방송부에 지원할 생각을 먼저 했었는데 부서에 지원하기 전 풍물패에 들렀다가 선배들이 악기 치는 모습이 좋아 보여 결국 풍물패에 들어가는 것을 택했다. 그리고 나는 풍물패에서 선배들에게 상모를 배우고 2학년 때부터는 상쇠 자리까지 맡게 되어 풍물패를 이끌게 되었다. 그리고 각종 대회에 나가서 상도 받고 공연도 하면서 시에서 운영하는 고등학교 연합 풍물패에서도 상쇠를 하게 되었다. 나는 대학 진학을 국악으로 선택하라는 제의를 받기도 했었는데 그만큼 우리 학교 풍물패는 전국에서 실력 있는 풍물패였다. 다만 취미로 활동하는 것일 뿐, 그것으로 직업을 할 생각은 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악 전공으로 대학에 진학할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나의 고등학교 때 기억은 풍물패밖에 없다. 점심시간이나 방과 후, 방학 때에는 항상 풍물패에서 연습을 해야 했기 때문에 반 친구들과 어울릴 시간도 없었고 학업에 열중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고등학교 때 반 친구들은 나를 '풍물패의 조용한 애' 정도로만 기억할 것 같다. 사실 나는 누구보다 활발하고 개성이 강하며 할 줄 아는 게 많은 사람이었는데 고등학교 때 친구들에게 내 진짜 모습을 보여줄 기회는 많지 않았던 것 같다.
꽤 많은 활동을 하고 지낸 학창 시절을 지나 대학생 때에도 나는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서 낮에는 학업에 전념하고 밤에는 배우로서의 삶을 이어가면서 남들과는 조금 다른 대학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다 대학 4학년이 되자, 남들이 다들 진로를 결정하는 모습에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던 것 같다.
'내가 가야 할 길은 과연 무엇일까? 하고 싶은 것은 너무 많아서 이것저것 많이 손댔지만 정작 평범한 직업을 위해 나아간 길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고 싶은 것만 계속하면서 살고 싶은데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평생 배우고 싶은 것만 배우고,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 수는 없을까?' 어린아이처럼 그렇게 고민했다.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돈이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취업 전선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그 현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도 객관적인 시각으로 나를 바라봐야 했다. 뮤지컬 배우로서의 삶을 계속 이어가고 싶었지만 나에게는 뛰어난 성량이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기관지가 좋지 않아서 죽을 고비를 넘긴 적도 있다. 그래서인지 목소리도 얇고 약한 편이라서 호흡도 길지 않다. 그래서 나 스스로 뮤지컬 배우로서 평생 성공적인 삶은 살아갈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나는 극단 생활을 포기하고 사회인으로서 나아가야 할 길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때가 나의 가장 큰 사춘기, 아니 오춘기가 아니었나 싶다.
뮤지컬을 그만둔 후로 그전까지 항상 저체중이라서 먹어도 먹어도 살이 안 찌는 체질인 줄 알았던 몸에 이상 반응까지 왔다. 생리가 오지 않아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았는데도 9개월 동안 생리를 안 할 정도로 순환이 안 되었다. 병원을 다니다가 해결이 안 돼서 한의원에 다녔는데 한약을 먹은 후 그제야 생리가 다시 왔다.
또 취업 면접을 보고 나오면 항상 펑펑 울었다. 뭐가 그렇게 힘들었는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해야 할 때 나는 극도로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 같다. 어려서부터의 성향이 커서도 크게 바뀌지 않은 탓이었을 것이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해야 할 때 반항하던 그 성향,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해야 그 분야에서 진가를 발휘하는 그 습성이 계속된 것이다.
그래도 결국은 현실을 받아들일 줄 알았던 나는 그렇게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취업 준비의 첫걸음으로 자격증부터 따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먼저 프랑스어 시험(DELF)을 보고 운전면허, 컴퓨터 자격증을 땄다. 다행히 나는 완벽주의 성향이 조금은 있어서 한 가지 일을 시작하면 끝을 보고 남들보다 그것을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다. 그래서 무엇이든 열심히, 빠르게 배웠다.
그리고 나는 수능 직후부터 계속해서 쉬지 않고 해 왔던 과외 선생, 학습지 강사, 공공 근로 등의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으로 프랑스에 다녀오기로 결심했다. 취업을 준비해야 할 시기에 어떻게 보면 황당한 결정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때 어학 경험도 따로 없는 나에게 뭔가 전환점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까지 나는 한 번도 해외여행을 가 본 적도 없었지만 '프랑스어를 전공했으니 프랑스에 한 번은 가 봐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프랑스 여행 계획을 시작했는데 혼자 가는 첫 여행이 먼 나라였기 때문에 주변에서 걱정을 많이 했었다. 하지만 나는 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내가 겁 없이 그렇게 떠날 결심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나에게는 외국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거다.
나는 대학 2~3학년 때부터 교환학생으로 우리 학교에 온 프랑스 친구와 친하게 지냈었고 그 친구를 통해 알게 된 다른 여러 외국인들과 교류를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외국과 외국인들에 대한 관심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친구들과 영어나 한국어로 대화했었는데 그 친구들이 한국어가 가능했던 이유는 한국어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외국 친구들은 일본, 미국, 프랑스, 중국 등 국적이 다양했는데 나는 그들과 같이 놀면서 자연스럽게 친구들에게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알려 주게 되었다.
외국 친구들과의 교류는 그 자체만으로도 즐거웠고 우리의 우정은 한국 친구들만큼이나 두터워져서 같이 모여서 요리를 해 먹기도 하고 노래방에도 가고 여행도 같이 다녔다. 나는 특히 일본, 프랑스 친구와 친하게 지냈는데 그때 그 친구들이 내게 한국어 선생님을 하면 잘 가르칠 거 같다고 말해 주었고 나는 그때 처음 '한국어 강사'라는 직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구체적으로 내가 어떤 식으로 나아가야 할지 알지 못 한 채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4학년 여름 방학이 다가왔고 학생 때가 아니면 여행도 길게 하기 힘들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던 나는, 본격적으로 취업 전선에 뛰어들기 전에 프랑스에서 외국 생활을 경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우리 부모님은 내가 먼 나라 프랑스까지 혼자 가는 것을 너무 걱정하셔서 여행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나는 부모님을 설득하고 가족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안전하게 다녀올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고민 끝에, 친한 프랑스 친구의 도움을 받기로 했는데 그것은 바로, 친구의 집에서 홈스테이를 하는 것이었다. 경제적인 부담도 클 수밖에 없었는데 그 여행 비용도 내가 그동안 모은 돈으로 다녀오겠으니 허락만 해달라고 부모님을 설득했었다. 그때 엄마가 하셨던 말씀이 지금도 기억이 난다. "네가 가지 말라고 말린다고 안 갈 애가 아니지." 어렸을 때부터의 내 성향이 한 번 마음을 먹으면 뭔가 하는 애였기 때문에 엄마도 반대를 못하셨던 것 같다.
친구 집에서 홈스테이를 하기로 했던 비용은 지금 생각하면 터무니없이 적은 돈이었는데 그때는 그 돈도 굉장히 크게 느껴졌었다. 그래도 이때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에 이번에는 프랑스에 꼭 가 봐야겠다는 마음만 앞섰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나의 첫 해외여행으로 프랑스에 홀로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그때 일본을 경유해서 갔기 때문에 일본에 살고 있던 친구와 일본에서 만나기도 했었다. 일본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도 나는 엔화를 환전해 갈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었다. 엔화를 챙겨가지 않아서 친구와 연락하고 가족들과 연락할 때에도 호텔 전화를 이용했는데 원화로 지불하고 호텔 직원들이 환전을 직접 해서 주기도 했었다. 그때는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전자사전을 가져갔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호텔 직원이나 사람들과 대화할 때 지금처럼 구글이나 파파고 번역기가 없어서 힘들었지만 나름 내 실력으로 대화를 했던 기억이 있다. 겁도 없이 떠난 첫 해외여행이라 실수 투성이었지만 다행히 일본에서도 친구가 있었고 프랑스에서도 친구가 있었기에 나의 첫 해외여행이 지금까지도 값진 여행의 기억으로 남을 수 있게 된 것 같다.
프랑스 친구의 아버지께서는 군인이셨다. 내 기억으로는 기마병이었던 것 같다. 프랑스 대혁명일인 7월 14일에 군인들이 행진할 때 TV에 친구의 아버지도 나오셨다. 친구의 아버지께서 군인이셨기 때문에 그의 가족들은 파리 근교의 군인 관사에서 살았다.
군인 관사는 외부인 출입을 엄격하게 통제하기 때문에 그만큼 안전하게 머물 수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출입할 때마다 혼자 나갔다 들어올 수가 없어서 항상 친구 가족들이 나와 동행했었다. 그 집에는 내 친구의 방도 있었지만 그는 학교 기숙사 생활을 했기 때문에 자신의 방을 나에게 내어주기로 한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친구의 가족들이 내게 베풀어 준 배려는 정말 고맙고 따뜻한 일이었다. 군 관사에 외국인이 들어와서 지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지금은 잘 안다. 내가 군 기관에서 일해 봤기 때문에 친구 가족들이 나를 위해 얼마나 많은 불편함을 감수했을지 지금은 잘 알지만 당시에는 그런 것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나는 친구와 그의 가족들 덕분에 지금까지도 프랑스에 대한 좋은 추억과 행복한 기억을 많이 갖고 있다. 내가 프랑스에서 머물렀던 그 해 여름은 내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고 나를 더 많이 알아갈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이 여행을 통해 내가 미술과 예술, 문화, 역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더욱 알게 되었고 프랑스에서의 시간은 내게 편견 없는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까지 선사해 주었다.
나는 매일 작은 도시의 박물관과 미술관에 가서 내 지적 호기심도 채우고 오래된 궁에도 찾아다녔다. 파리에서는 루브르 박물관에 일주일 동안 출퇴근 도장을 찍듯이 가서 모든 작품을 천천히 감상했고 베르사유 궁전에서는 하루 종일 걸으며 산책을 즐기기도 했다.
친구의 어머니께서 매일 아침, 점심, 저녁으로 챙겨주신 프랑스 가정식 요리들, 각종 치즈와 와인, 디저트를 알게 되면서 내가 와인과 치즈를 너무나 좋아하는 사람이라 프랑스와 참 잘 맞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프랑스는 앞으로도 나와 계속 인연이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프랑스에서의 추억과 경험이 계기가 되어 내 꿈은 '프랑스에서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알리는 사람'이 되는 것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해 겨울, 나는 우리 대학에 처음으로 생긴 '한국어 교원양성과정'을 듣게 되었고 수업을 통해 알게 된 교수님들께 자문을 구하다 여러 정보도 얻게 되었다. 그때 처음 알게 된 '한국어 교사 모임' 카페에 들어가 열심히 정보를 찾으면서 이력서를 제출하고 시범 강의를 다녔다. 그러면서 2급 자격증을 받기 위해서는 대학원에 진학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때 바로 지원 가능했던 대학원 두 곳에 바로 지원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대학원에 한 번에 합격했고 입학하기 전, 나는 운이 좋게 경기도에 위치한 'K 대학교'의 한국어 강사로도 뽑히게 되었다. 나는 그렇게 한국어 강의와 학업을 동시에 하는 대학원생, 강사가 되었다.
나는 한국어 강사가 되기 전까지 고향의 작은 학원에서 전임으로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고 과외로는 국영수를 초중고 학생들에게 계속 가르쳐 왔다. 대학을 다니면서 영어 학습지 강사로도 일하기도 했고 이렇게 한국어 선생이 되기까지 가르치는 일을 계속해서 꾸준히 해 왔었다. 다만 교육 대상자가 한국인이 아닌 외국인으로 바뀌었던 것뿐이었다.
이렇게 나는 프랑스 문학을 전공하고 복수 전공으로 고고학적 지식과 역사, 문화 인류학적 지식을 쌓으며 열심히 대학 생활을 했고 그러면서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던 글쓰기와 국어, 외국어로 내가 가야 할 길을 천천히 가게 되었다. 그 시작은 우연과 필연들이 어우러져 나를 이 세계로 이끌었다. 여러 가지 것들을 다방면으로 배웠던 경험들이 내 직업을 선택하는 데에 큰 영향을 준 것은 아니었는지, 호기심 많고 배움과 가르침에 있어서 주저함이 없었던 나의 성향이 이 직업과 딱 맞아떨어졌을 거란 생각을 해 본다.
처음 설렜던 외국, 프랑스, 그리고 우리의 것을 알리고 싶었던 애국심, 잡학 다식했던 나의 배움과 취미 활동들이 조화롭게 어울리는 그런 직업, '한국어 선생'으로서의 삶이 그렇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