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하지 않아도 되는 데도 경쟁을 하고 있는 사람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이 글을 쓰기 전까지 많이 망설였다. 그동안 내가 겪었던 여러 가지 사건들, 인간관계에서 터진 일들, 여러 기관에서의 이야기들은 한 사람이 겪은 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의 많은 일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적나라하게 고발하듯 사실적으로 기록해야 할지, 미화를 섞어 희망적으로 그려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시작으로 어떤 방식으로 이 글을 기록해야 할지를 오래 고민했다. 사실 아직도 그 결론을 내지 못한 채 나는 글을 끄적이는 중이지만 의식의 흐름대로 내 생각을 따라 써 내려가다 보면 이 글은 완성이 되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내가 기관에 소속되어서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항상 해왔던 생각은 '가르치는 것으로만 만족을 느끼며 일할 수는 없을까?'라는 것이었다. 나는 외국인들에게 우리말과 우리 문화를 가르쳐 주는 것에 행복함을 느꼈고 외국인들과 생각을 교류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서 만족감을 느꼈다. 그래서 처음 이 직업을 가졌을 때 직업에 대한 자부심과 만족도가 높았고 내가 살아있음을 느꼈다.
하지만 그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럴 때마다 항상 문제가 되었던 부분은 '가르치는 일' 자체의 문제가 아닌, 그 외의 것들이었다.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하면 느낄 수 없는 기관의 갑질, 일관되지 않은 운영 정책, 다른 교사들과의 마찰 등이 바로 그런 것들이었다. 그중에서도 내가 뼈저리게 느껴야 했던 부분은 항상 '적'은 내부에 있고 서로를 갉아먹는 '질투'라는 감정과 '밥그릇 싸움'이었다.
그 시작은 첫 직장이었던 'K 대학'에서의 일이다.
나는 운이 좋게 대학원에 입학하기도 전에 한국어 강사로 대학에서 시간 강사를 시작하게 되었고 주 8~12시간 수업을 하게 되었다. 교실 1개 크기 정도되는 한국어 강사 사무실에는 내 자리가 따로 없이 컴퓨터 2~3대와 복합기가 있었고 사물함만 각자의 것이 있었을 뿐, 자리는 선착순으로 앉아야 하는 그런 구조였다. 30여 명의 강사들이 근무했지만 서로 자신의 수업만 하고 집으로 돌아가거나 친한 교사들끼리 아름아름 그룹을 이루고 있는 상황이기도 했다.
나는 어떠한 연고도 없이 들어갔던 곳이었기 때문에 아는 사람도 없었고 한국어를 가르쳐 본 경험조차 없었던 신입 시절이었기에 첫 학기는 동료 선생님들과 조금씩 대화를 트면서 적응하기에 바빴다. 동기 중에 내 또래들도 있었고 나보다 먼저 들어온 선생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대학원에 재학 중이거나 졸업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대학원 재학 중에도 일을 하는 강사들이 꽤 있었다. 특히 중국 학생들이 많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중국어 쪽으로 석사를 하고 한국어 교원 자격증만 가지고 있는 선생님들도 꽤 많았다. 석사 수료만 하고 졸업을 하지 않은 선생들도 있었고 박사 과정인 분들도 있었는데 박사는 수료할 때까지 남아 있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박사 수료 이후에는 다른 대학의 전임이나 교수로 자리를 옮기는 분위기였다.
지금은 대학 기관을 포함하여 대학에서 일을 하려면 석사 이상이 아니면 취업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고 박사 수료한 이후에도 시간 강사 자리 외에는 갈 수 있는 길이 많지 않은 게 현실이지만 2000년대 초중반에는 자격이 완벽하지 않아도 일할 수 있는 곳이 꽤 많았다. 특히 다문화 센터 같은 곳에서는 석사 자체를 요구하지 않는 곳들이 많았다. 한국어 교원 자격증도 없이 대학원에 입학하자마자 강의를 시작할 수 있었던 내 경우만 봐도 어느 정도 융통성 있게 취업이 가능했던 시기였다. 지금보다 외국 학생들이 많지 않았던 시절이었음에도 지금처럼 대우가 아주 안 좋다는 느낌도 받지 못했던 것 같다.
물론 내가 신입의 입장이었으니 돈이 적어도 경력을 쌓기 위해 열심히 해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기 때문에 지금 느끼는 것과 그때 느꼈던 감정이 다른 것도 있을 것이다. 적어도 그때는 어느 기관에 들어가면 내가 잘릴 거라는 걱정은 하지 않고 그렇게 일을 했던 것 같다. 내가 일을 그만두더라도 얼마든지 다른 곳을 찾을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물론 그때도 여러 면에서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었지만 '밥그릇 싸움'을 해야 할 정도로 자리가 부족하지는 않았고 선생님들끼리 경쟁하기 위해 서로를 헐뜯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코디네이터 교수가 바뀌게 되었다. 내가 K 대학교에서 일한 지 3년쯤 되었을 때의 일이었는데 그전까지 나는 대학원에 다니며 학업과 일을 병행하며 나름 열심히 살아왔다. 대학원 졸업 후에는 한국어 교원 자격 2급을 취득하였기 때문에 더욱 당당하게 내 분야의 전문가로서 한걸음 나아가게 되었다.
그동안 10년 정도는 같은 교수님이 그 학교의 '코디네이터'로서 과정을 이끌어 왔었던 걸로 안다. 그런데 갑자기 서울 K 대학 출신이라며 다른 분이 코디네이터로 오셨다. 한국어 교육 기관에서 말하는 코디네이터라는 직책은 그 학교의 교육 과정을 운영하고 관리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가 오면서부터 이 바닥의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 무렵 비정규직법이 적용되었던 강사법에도 하나둘씩 문제가 생기기 시작할 때이기도 했다. 1년 이상을 일하고 그만두어도 퇴직금 같은 것을 받지 못했던 시기였다. 그래서 강사들 중에는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다른 학교들에서 노동부에 신고한 강사들에 대한 이야기가 들려오면서 그동안 일용직보다 못한 대우를 받았던 시간 강사들의 처우에 대한 이야기가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노동부에 신고했던 강사들은 소문이 나서 다른 대학에서 채용을 꺼린다는 말도 들렸고 강사들이 한 명씩 그만두는 경우가 생기면서 그들이 노동부에 신고하는 바람에 그 학교에 남아 있는 선생들이 피해를 고스란히 받게 되었다는 말도 돌았다. 또 오래 일하다가 그만두는 사람들이 생길 경우에는 그 학교가 발칵 뒤집힌다는 말도 나오기도 했었다.
그전까지는 서로 챙기며 협력하며 일했던 강사들이 하나둘씩 한 학교에서 머물지 않고 자리를 옮기면서 강사 처우가 좋지 않다는 인식이 서서히 생겼다. 그 무렵 내가 근무했던 K 대학 역시, 강사법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였고 코디네이터 교수가 바뀌면서 점점 서로 감시하고 평가하는 문화로 바뀌게 된 것이다. 앞으로 내 글에는 그때부터 겪었던 이 바닥의 일들이 하나하나 펼쳐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