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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 Mer 라메르 Apr 23. 2024

동료와 적은 함께 한다!

동료와 적을 구분할 수 있을까?



호락호락하지 않은 처음, 무모하고 겁이 없던 나!


 나는 첫 직장에서 오전에는 일하고 오후에는 회의와 업무를 했고 일주일에 두 번은 대학원 수업을 들었다. 교육대학원 수업은 저녁 수업이라서 일과 학업을 병행할 수 있었다.

 내가 일했던 'K 대학'은 대학원과 거리가 꽤 있었기 때문에 나는 매일 하루 왕복 4~5시간은 기본으로 길거리에 뿌리고 다녀야 했다. 일을 시작한 초반에는 대중교통으로 다녀야 했었는데 이렇게 길에서 많은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집, 직장, 대학원이 각각 다른 도시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한국어 강사로 취업했던 2008년 6월에는 언니가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지방 출신이었던 나는 당장 머물 곳이 없었고 서울에는 언니가 있으니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생각이었는지 거리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언니는 직장 생활하며 결혼한 지 한 두 달밖에 되지 않은 신혼이었는데 나는 그런 언니집에서 얹혀살게 되었다. 내가 언니집에서 흔쾌히 머물 수 있게 해 준 형부님 덕분에 나의 무모한 서울 생활이 그렇게 가능했던 것이다. 지금도 나는 언니와 형부의 은혜를 잊을 수가 없다. 대학원 수업을 마치고 밤늦게 집에 들어갈 때에는 언니와 형부가 지하철역까지 마중 나왔고 나의 일상을 두 사람에게 시시콜콜하게 풀어놓으며 스트레스도 풀 수 있었다. 형부가 나보다 11살이나 많은데도 형부와 수다 떨고 지내는 게 어색하지 않았다.  그리고 일이나 수업이 없는 주말에는 부모님이 계시는 고향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나의 일상이었다. 


 나는 집, 직장, 학교로의 이동 거리가 꽤 많았기 때문에 쉽게 지칠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 보면 이때 내가 기차, 버스, 지하철로 다닌 거리가 조금 과장해서 지구 몇 바퀴를 돌고도 남았을 것 같다.

 언니집에서 얹혀 산지 3~4개월쯤 지난 어느 날, 나는 지하철역에서 계단을 올라오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지고 말았다. 하루 종일 일하고 이동하고 공부하고 이동하면서 기운이 빠져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날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는 이유는 故 최진실 배우가 그날 사망했다는 뉴스가 보도되면서 충격을 받은 날이기도 해서였다. 그의 갑작스러운 자살 소식으로 나도 조금은 넋이 나가 있었고 그래도 지친 몸이 힘들었는지 다리에 힘이 풀려버린 것이다.

  유명 배우의 죽음도 믿기지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베르테르의 효과'처럼 나도 힘이 빠졌고 서러움이 밀려오면서 여러 감정이 교차했다. 그래서 나는 이날 이후 독립해서 살 집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사회 초년생이었기 때문에 가진 돈도 없었고 시간 강사로서 시간당 2만 8천 원을 받았던 때이기 때문에 내가 버는 돈만으로 자취 생활을 결정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우선 보증금이 부족했다. 그때 웬만한 원룸들의 최저 보증금이 500만 원이었는데 대학 때부터 쉬지 않고 과외 아르바이트를 꾸준히 하긴 했지만 내가 모은 돈으로는 부족한 게 현실이었다. 그래도 나는 조금이라도 내 몸을 챙기고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이대로 계속 지내다가는 스트레스도 받고 정말 쓰러질 거 같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이런 고민을 하는 것을 언니와 형부가 알았고 형부는 내 월세 보증금을 대주었다. 그 보증금은 나중에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야 갚을 수 있었는데 그때 그 돈은 정말 단비 같은 희망이었다. 형부 덕분에 나는 대학원과 직장 중간 지점의 서울의 한 동네에서 엘리베이터가 없는 5층 건물 중 5층에 작은 원룸을 겨우 구하게 되었다. 어려운 상황에서 이런 도움은 내게 큰 힘이 되었다.  

 집 앞에는 초등학교가 있었고 집 바로 앞에 마을 버스정류장이 있어서 지하철역으로도 다니기 편한 동네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지역은 영화에서 주로 질이 안 좋은 동네로 등장하고 서울 사람들이 기피하는 지역이었다. 특히 외국 사람들이 많이 사는 그런 동네였는데 거리와 돈을 생각해서 나에게는 최적의 장소였기에 그곳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고 나는 그곳에서 1년을 살았다.


 나는 부모님뿐만 아니라 오빠와 언니의 지원 덕에 대학 4학년때부터 차를 타고 다닐 수 있었다. 그런데 서울 길도 잘 모르고 주차 문제나 유지비 등이 쉽지 않으니 그 차를 서울에서 타고 다닐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고향에서 서울에 갈 때는 기차역이나 고향집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기차를 타고 다녔다.

 그래도 그 시간은 꽤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나는 그 시간에 책이나 영상을 집중하며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PMP와 전자책, 아이패드를 들고 다니며 기차, 지하철 안에서의 시간을 나름 잘 활용했던 것 같다. 나는 이때부터 사용했던 아이패드를 고장 나기 전까지 10년 넘게 잘 사용했었다.


 나는 서울에서 지내는 시간이 일주일에 3일 정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매일 언니집에서 머물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내 집을 구하기 전까지는 주말마다 고향으로 오고 가는 게 나의 루틴이었다. 그러다가 언니집이 아닌 원룸으로 이사를 하면서부터 나는 고향에 두었던 내 차를 가지고 와서 자차로 출퇴근을 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나의 행동반경은 더욱 넓어졌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낮에는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저녁에는 대학원 수업을 듣고 수업 후에는 과외도 병행했다. 그중 고3 과외를 할 때에는 밤늦게 과외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새벽에 집에 들어갔다가 새벽에 출근하는 일상을 보내기도 했다.

 

 첫 직장에서 지낸 4년 동안이 나에게는 가장 치열하게 살았던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그때의 경험과 경력들이 쌓여서 나는 그 후 어디에 가서도 버틸 힘을 얻었던 것 같다.

 

 나는 한국어 강사 자리에 처음 지원할 때에는 막연하게 서울 경기 지역어디에서든 충분히 다닐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같다. 그런 나의 무모한 생각 덕분에 내가 모르는 지역이라도 지역 불문하고 가서 많은 경력을 쌓을 있었다. 나에게는 그런 '없는 무모함'이 있었기지금까지도 나라, 지역을 가리지 않고 나는 달리고 있는 모양이다.




첫 직장에서의 배신!


 내 직장이었던 'K 대학'!


 첫 직장에서 3년이 지나자 일도 익숙해지고 어느 정도의 경력과 노련함이 쌓였다. 대학원 학업도 마치고 한국어교원자격증도 따고 직장 생활도 안정되어 가니 일에 더 집중할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서울에서 사는 것보다 'K 대학'이 있는 지역으로 집을 옮기는 것이 낫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보증금을 늘려서 크고 안전하며 조금 더 내 시간을 절약할 있는 집으로 이사를 하고 나니 나의 생활은 안정이 되는 듯했다. 경력이 쌓이면서 주변 다른 대학으로 학부 강의도 나가게 되었고 강의 요청도 받게 되었으며 들어오는 과외도 많아졌다. 그런데 동시에 'K 대학'에도 이상한 바람이 불어왔다.

 

 코디네이터인 교수가 바뀌면서 여러 가지 변동 사항들이 늘어났다. 이 대학에서는 자체 교재로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그 교재는 출판을 하지 않고 내부에서만 사용되는 자료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다른 대학의 교재의 내용들이 무분별하게 섞여 있기도 했고 내용을 짜 맞춰 놓은 책이었기 때문에 출판을 하기에는 미흡한 부분이 있었다. 그래서 그 교재를 다시 작성하고 정비하는 작업부터 시작했던 것 같다.

 교재 수정 작업, 교안 작성, 매주 1시간 이상 하는 각 급 회의 등 업무량이 늘어나기 시작했으며 수업을 준비하는 시간보다 다른 업무의 양이 더 많아졌고 조금씩 일이 까다롭게 느껴졌다.

 또 그동안 모두 동등한 입장이었던 강사들의 위치가 급주임이 생기고 급주임이 강사들을 평가하는 방식으로 바뀌기도 했다. 모든 의견은 급주임과의 회의를 통해 말할 수 있었고 코디네이터 교수에게 어떤 말할 때에도 급주임을 통해 할 수 있는 구조로 바뀌게 된 것이다.


 어느 날은 교수에게 직접 어떤 사항에 대해 이야기하려 하니까 급주임을 통해서 말하라며 말을 끊기도 했다. 갑자기 관료 사회가 되어 버린 것이다. 동등한 입장의 시간 강사가 아닌, 계급 단계를 거쳐야만 어떤 말을 할 수 있는 분위기로 바뀐 것이다.

 급주임을 뽑은 기준도 모호했고 교수가 갑자기 지정한 사람들이 급주임이 되었으며 그러면서 선생들끼리의 갈등도 시작되었다. 경력이나 학력과 상관없이 뽑힌 기준이라 느껴지기도 했고 서로 친한 사이와 친하지 않은 사이의 갈등도 점점 분명해 보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급주임이 같은 급의 강사들을 평가하기 시작하면서 강사들 사이의 갈등은 더욱 커져갔다.

  

 그때 나는 더 상황이 좋지 않았던 게 다른 선생들은 한 개 급에서만 수업을 했는데 나는 강의 시간이 10시간밖에 안 되는데도 두 개 급에 들어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나 외에도 2개 급에 들어가는 선생님이 한 두 명은 더 있었지만 그 선생들은 레벨이 비슷한 조건이거나 수업 시수가 많아서 그럴 수밖에 없었던 반면, 나는 수업 시수가 많은 것도 아닌데도 급이 두 개로 갈라지니 일의 양이 다른 사람들의 두 배가 될 수밖에 없었기에 문제라고 느꼈다. 또 평가를 받을 때에도 급주임 두 명으로부터 평가받아야 한다는 사실도 달갑지 않았다.

 

 나는 이때 대학원 학업과 과외, 출강 등을 동시에 해야 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체력적으로 힘든 상태였었고 다른 선생들은 한 학기씩 쉬었다가 돌아오기도 했지만 나는 쉬지 않고 3~4년을 달렸기 때문에 지쳐있었다. 이렇게 가다가는 다음 학기에도 두 급 이상의 수업을 맡으면 힘들어질 게 분명해졌다. 그래서 나는 다음에는 한 개의 급만 주겠지라는 생각으로 다음 학기 수업 배정을 기다렸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다음 학기 시간표를 순간 나는 화가 치밀어 오를 수밖에 없었다. 지난 학기에 급에서 두 학기를 수업했었으니 이번에는 그래도 형평성에 맞게 개의 급에서만 수업할 수 있을 것을 기대했던 나에게 개도, 개도 아닌 수업을 것이다. 매일매일 다른 수업을 하라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화가 난다. 이쯤 되면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급주임을 거치지 않고 코디 교수에게 결국 면담 요청을 했그와 드디어 독대를 하게 되었다.


 전에 이런 일도 있었다. 그는 내 수업에 예고도 없이 들어와서 한 시간 동안 앉아 나의 수업을 지켜본 적도 있었다. 학생들이나 나보다 먼저, 내가 수업하는 교실에 들어와 있더니 자리에 앉아서 학생처럼 내 수업을 한 시간 동안 지켜봤던 것이다. 다른 선생들에게도 이런 상황이 있었냐고 물었는데 없었다는 답이 돌아왔고 나는 그때 이 사람이 나에게 뭔가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느꼈었다. 그리고 상당히 불쾌했었다.

 내가 대학원생도 아니고 내 수업을 참관하려면 적어도 사전에 동의를 구한다거나 어떠한 이유 때문에 수업을 한 번 보겠다고 말을 했어야 한다. 나를 평가할 예정이면 '평가하겠다'는 말이라도 했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그 교수의 무례한 행동에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나는 내 수업을 자연스럽게 진행했다.

 그 후 그는 선생들이 모두 있는 자리에서 수업을 평가했다. 좋지 않은 내용만 지적했을 뿐이었다. 결국 트집을 잡을 거라면 모든 사람에게 같은 조건으로 평가했어야 하는데 나한테 유독 그랬다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았다. 어떤 수업도 작정하고 평가하면 완벽한 수업은 없다. 그때 그의 행동은 그래 보였다. 뭔가 꼬투리를 잡고 싶어 하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렇게까지 나에게 뭔가 다르게 행동했는데 내게 3개 급의 수업을 하라고 하는 것은 같은 강사료를 받는 시간 강사 입장에서 나만 일을 두 배, 아니 세 배를 하라는 것인데 그것은 내 입장에서는 부당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지난 학기에도 2개의 급을 수업하느라 회의도, 일도 다른 선생들의 두 배로 해야 해서 너무 벅차고 힘들었다. 이번에는 3개 급을 주셨는데 반을 교체해 줬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더니 돌아온 대답은 "저는 의도를 가지고 수업을 구성한 게 아니라 어쩌다 보니 선생님이 능력이 더 많아서 수업을 더 드린 건데 왜 안 좋게 생각하세요?"라고 말하는 거다. 그러면서 다음에 한 말은 더 어이가 없었다.

 "그리고 안 그래도 선생님 때문에 제가 골치가 아파요. 학생 평가가 너무 안 좋으셔서요." 이러는 거다. 능력이 많아서 수업을 더 준 거라더니 이건 또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일까? 나는 이때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수업을 잘 못하거나 학생들한테 비난받을 수준은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처음 1년은 아마 서툴러서 제대로 못했을 것 같다. 하지만 4년을 일하면서 내 강의 평가가 좋지 않다는 말은 처음 듣는 말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물었다.

 "제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강의 평가가 어떻게 안 좋게 나왔나요? 제가 코멘트를 좀 볼 수 있을까요? 그래야 제가 뭐가 잘못된 건지 알고 고치죠."라고 말했고 그는 그건 보여줄 수 없다고 말하더니 점수화된 내용만 내게 그때서야 보여줬다. 이때까지 학생들이 했던 강의 평가는 한 번도 직접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 강의 평가가 안 좋다는 말에 '열심히 해도 안 좋을 수가 있는 거구나' 속으로 생각하며 확인했다.

 

 그런데 내 강의 평가 평균 점수는 '4.68'이었다. 5점 만점에서 '4.68'!

 나는 정말 기가 막히고 황당했다. 이 점수가 강의 평가가 안 좋다고 말할 수 있는 점수일까? 5점 만점에서 한 두 개가 4점이고 나머지는 5점이라는 소리일 텐데 이게 무슨 소리지? 그래서 나는 그에게 되물었다. 5점 만점에서 이 점수를 받은 게 낮은 점수인 거냐고. 그랬더니 그는 내게 다른 선생의 점수를 보여주면서 그 선생 점수는 '5점'이라는 거다. 내 점수가 가장 낮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 자료를 더 자세히 보니 조사 대상자 숫자가 '5점'을 받은 선생은 '10명'에게 평가받은 자료였고 내 점수는 '30명'에게 평가를 받은 자료였다. 그래서 나는 '10명 대상에게 받은 점수와 30명 대상에게 받은 점수가 어떻게 똑같이 비교될 수 있냐'라고 반문했고 '4점이 넘는 점수를 받은 게 낮은 점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말하자 그는 당황하며 얼버무렸다.

 

 그러더니 또 꺼낸 말이 "선생님은 동료 평가에서도 차이가 나서 안 그래도 제가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어요."라는 거다. 이건 또 무슨 말일까? 나는 또 당황될 수밖에 없었고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나는 나름 최선을 다해서 모든 회의에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었고 하라는 일을 충실히 다했었는데 내가 급주임 선생 평가에서 점수가 안 좋다는 말은 조금 이해가 되지 않기도 했다.

 나는 초급과 중고급 수업을 맡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급주임 두 명의 선생님은 한 사람은 나와 친한 분은 아니었지만 평소 그분을 실력 있는 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가 많이 배워야겠다고 생각했고 한 사람은 나와 동기 선생으로 나이도 같았고 경력도 비슷해서 평소 친하게 잘 지내던 선생이었다. 그래서 나는 두 사람의 평가가 달랐다는 말에 '혹시 나와 친하지 않은 선생님이 나를 안 좋게 평가하신 건가'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도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제대로 일을 안 한 적이 없는데'라는 생각에 조금 서운하기도 했다.


 그런데 반전이었다. 두 선생의 평가서는 내 생각과 반대였다. 나와 별로 친하지 않은 선생님은 내게 만점에 가까운 90점대를 줬고 내가 평소 친하다 생각했던 선생이 내게 60점대 점수를 준 것이었다.

 

 나는 그 점수를 보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정말 배신도 이런 배신이 없었다. 그 이유는 친하다 믿었던 그 동료 선생이 급주임을 맡았을 때에도 왜 하는지 이해가 안 될 정도로 일을 잘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동료니까 그를 응원했고 함께 했다. 객관적으로는 선생이 급을 이끌만한 카리스마가 없었고 회의 때마다 제대로 준비된 모습도 보여주지 못했었다. 급주임으로서 일을 제대로 못해서 오히려 내가 같이 도와줬고 다른 선생들이 회의에 불참하는 상황에서도 나는 끝까지 그와 함께 했었다. 나는 없는 시간을 쪼개서 항상 잘하려고 노력했었고 매일 같이 잘 지내면서 이야기하고 그렇게 친하게 지내던 사이였다. 아니, 친했다고 믿었다. 그게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선생이 내 점수를 그렇게 준 것은 정말 악의적이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나의 멘털은 이때 무너졌던 것 같다.


 코디 교수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두 급주임이 나를 너무 다르게 평가하니 뭘 믿어야 할지 모르겠어서 혼란스럽다고 말이다. 차이가 극과 극이니 내가 본인이라면 어떻게 하겠냐고 기까지 했다.


 나는 보통 억울하고 분하면 눈물이 난다. 감동적인 순간에도 눈물이 나지만 특히 억울하고 화가 나면 말이 더 빨라지지만 더 논리 있게(?) 말한다. 우선 나는 재차 그에게 수업 시간표를 바꿔 줄 수 있는지 물었고 안 된다는 그의 대답에 "그럼 저는 한 학기만 좀 쉬겠습니다. 몸이 좋지 않아서요."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돌아온 대답은 안 된다는 거였다. 그의 그 대답도 황당했다. 다른 선생들은 한 학기씩 휴직을 종종 했다. 1년에 두 학기를 휴직하는 선생들도 있었다. 쉬었다가 돌아오는 게 가능했었는데 이제는 휴직이 안 된다는 거다. 이 여자가 나한테만 대체 왜 이러는 걸까 싶었다. 그가 내게 바라는 것은 내가 내 발로 나가 주는 거였구나 싶었다.

 이 일이 있기 전에 이미 많은 선생들이 이 학교의 시스템에 불만을 갖고 떠났다. 나와 동기 선생이나 그전에 들어온 선생들, 그리고 나보다 늦게 들어왔던 선생들도 이미 꽤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떠났을 때였다. 그래도 나는 그에 비하면 꽤 오래 버틴 셈이었는데 원년 멤버로 남은 사람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나는 그날, 그에게 할 말을 쏟아붓고 퇴직을 결정했다. '동료 평가는 서로 평가해야 맞는 게 아니냐', '왜 나는 급주임을 평가를 안 하고 급주임만 일방적으로 나를 평가하는 거냐', '그리고 그 평가 방식이 객관적인 자료가 된다고 생각하냐'라고 말했고 이에 대한 그의 대답은 "왜 진작에 이런 이야기를 회의 때 안 하셨어요? 그때 말했으면 반영했을 텐데"라고 말하는 거다.

 그래서 나는 또 그에게 말했다. '언제 그런 발언 기회를 우리에게 준 적이 있었냐', '서로 평가하고 사람들 사이만 안 좋게 만들고 지금 이렇게 급주임 평가 자료를 나한테 보여주는 것도 이간질시키는 것밖에 안 되지 않냐'라고 말했다. 나는 이미 그만 둘 생각을 했기 때문에 할 말은 해야 했었다.

 

 그리고 나는 "휴가 사용이 안 된다면 저는 그럼 그만두겠습니다."라고 말했고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는 "그러실래요?"이러는 거다. 정말 기가 막히고 화가 나서 눈물이 터졌다. 그리고 그는 사무실 직원에게 내가 스스로 그만두는 거라는 걸 강조했다. 그 길로 나는 사물함에서 짐을 싸서 나왔다.

 내가 짐을 싸는 동안 동료 선생들이 옆에서 좀만 참으라며 가지 말라고 말리기도 했었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까지 밑바닥인 곳에서 몰상식한 사람과 일하고 싶지 않았다.

 

 이때 가장 심하게 밀려왔던 감정은 '동료 선생으로부터 받은 배신'이었다. 그리고 어떻게든 나를 자르려고 했던 코디 교수의 말도 안 되는 억측들이 정말 치사하게 느껴졌다. 그 후로도 그 대학에는 내가 아는 선생은 3명만 남고 나와 함께 일했던 다른 선생들은 모두 퇴사를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남은 3명의 선생 나에게 60점대 점수를 안겨 주었던 선생이 포함되어 있다.

 그만둔 우리들끼리 그때 한 이야기가 있다. 결국 말 잘 들으며 조용히 있었던 사람들만 남았다고. 갈 곳이 있는 사람들은 다 떠났다고. 지금 생각하면 참 별일도 아니었는데 다들 왜 그렇게 우리들끼리 그래야만 했을까? 결국 왜 그렇게 서로 상처를 줘야만 했는지 아쉬운 경험이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나의 첫 직장과 4년 만에 결별하였다. 시원섭섭한 마음에 그날 나는 펑펑 울고 새로운 길을 걸었다.


 내가 퇴사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나에게 그렇게 못되게 굴었던 코디네이터 자리가 다른 교수로 교체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렇게 일찍 떠날 사람이었으면서 그렇게까지 그곳을 헤집어 놔야 했을까? 그리고 내가 그의 타깃이 되어야 했던 이유는 과연 뭐였을까?

 그 후 대학은 대학 출신들로 채워졌다는 소리를 들었다. 결국 기존 선생들을 나가게 하고 자대 출신 선생들을 받고 싶었던 같다. 그리고 지금도 대학은 안정적으로 나아가고 있다. 

 

 나는 첫 직장에서의 퇴사가 아름답게 끝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는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많은 학생들과의 좋은 기억도 남아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끝이 안 좋았다고 모든 것이 안 좋은 것은 아니니 말이다. 나에게 많은 것을 안겨줬었고 많은 사람과의 인연, 소중한 기억도 함께 했던 시간이었다. 단지 마지막이 내 의지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 때문에 속상한 마음으로 나와야 했다는 사실이 기억에 남아 있을 뿐이다.


 직장에서 만난 그들은 내게 동료였을까? 적이었을까? 이때부터 나의 물음표는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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