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곳에서 설렘 발견하기
어렸을 땐 낯선 곳이 싫었다.
두렵고 무서웠다. 낯선 공기, 낯선 사람들, 새로운 모든 게.
엄마는 늦둥이 아들인 나를 애지중지하며 키우셨다. 내가 갓난아기일 때 유괴당할 뻔한 적이 있었는데, 이 때문이었을까, 엄마는 어딜 가나 나와 함께 했고, 그 결과 어렸을 때의 나는, 엄마 품을 떠날 줄 모르는, 엄마가 잠깐 자리를 비우기만 해도 지랄발광을 하며 울며 보채는 소위 엄마 '껌딱지'였다. 중학교 2학년 때, 친구들과 버스를 타고 15분 거리인 구립 도서관에 간 게 그 시절 내가 혼자 가본 곳 중 가장 먼 거리 기록이었을 정도로, 그때는 왜 그렇게 새로운 세상이 무서웠는지. 그때 탔던 버스, 창 밖의 공기, 도서관 계단을 오가는 분주한 발걸음 소리들이 아직도 생생하게 느껴지는 걸 보니 새삼 내가 엄청난 '쫄보'였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낀다.
그랬던 내가, 독일에서 일해보겠다고 한국을 떠나겠다니.
사실 지금도 어렸을 때와 별반 다름없이 '낯선 것'들이 두렵긴 하다. 하지만 스무 살 이후의 폭풍처럼 밀려들어온 '낯선' 삶들이 '낯선 것'에 대한 나의 생각을 많이 바뀌게 했다.
대구, 부산, 제주도에서 상경한 학과 및 동아리 동기들, 돈 보다 다양한 경험이 중요하다며 하나를 오래 하기보다 이것저것 짧게 짧게 했던 각종 아르바이트들, 30대를 앞두고 있는 지금은 가고 싶어도 한번 더 고민해 볼 것 같은 기차 배낭여행, PC방에서 게임을 하다 갑자기 홍콩을 가고 싶어서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친구와 비행기표와 숙소를 급하게 예약하여 그다음 날 바로 떠났던 해외 배낭여행, 집 가까운 곳에서 군 복무를 하고 싶어 선택한 의무경찰이었는데 눈 떠보니 제주도에서 군복무를 했던 경험, 그리고 남들 다 취업준비 할 시기에 휴학하고 독일로 교환학생을 떠난 일, 등등..
이 같은 낯선 것들은 내 삶이라는 병속에 새로운 경험을 마구 부어주었다. 대학 보컬동아리 활동을 하며 크고 작은 무대에 여러 차례 서봤고, 이 덕분에 남들 앞에 서는 게 여전히 어렵지만 남들 앞에 서기만 하면 벌벌 떨며 어버버 했던 무대 공포증은 사라졌다. 홀로 떠난 기차 여행을 통해 홀로 여행하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고, 이제는 혼자 여행함에 어색함보단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 다음날 무작정 떠난 홍콩여행을 통해서는 계획 없는 여행이 꼼꼼히 계획하고 떠난 여행보다 재미와 여유로움을 더 느낄 수 있구나라는 걸 배웠다. 제주도에서의 군복무 생활은 책과는 친하지 않았던 내게 독서의 묘미를 일깨워 줬고, 읽고 싶은 책들을 마음껏 읽고, 고독을 씹으며 자기 성찰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또한, 내 인생에 다시는 가볼 수 없다며 대학 졸업 한 학기를 앞두고, 취업에 대한 걱정은 미래의 나에게 맡겨버리고 떠난 독일, 그곳에서 너무나도 멋지고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처럼 결국에는 처음엔 두렵고 머뭇거렸던 행동들이 지나고 보면 다 좋았던 경험으로만 남더라. 힘든 일이 있었더라도 그 과정 속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더라. 지독히도 싫었던 '낯섦'은 어느 순간 '설렘'으로 바뀌더라. 이제는 낯선 곳에 가면 두려운 마음보다 설레는 마음이 더 크다. 그 낯선 곳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날 거고, 많은 경험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울 거기 때문에.
한국에 돌아와 취업을 하고 사회에 첫 발을 내딛을 때까지는 설렜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매일 반복되는 삶이 싫었다. 목표도 없이 방황하는 자신과 마주하자 무기력감이 몸을 짓눌렀다. '이대로 있다가는 은퇴할 때까지 똑같은 삶을 반복하겠구나'. 무서웠다. 출근길의 설렘은 익숙함으로 변해갔고 익숙함은 두려움으로 번져갔다. 낯선 것을 마주했을 때 느꼈던 두려움과는 다른 두려움이었다. '낯섦'의 두려움은 예기치 못할 상황이 올 거라는 두려움인데 반해 '익숙함'의 두려움은 삶을 유지하는 불꽃같은 게 사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불꽃, 원동력, 열정.
'그래, 내겐 열정이 필요해'
열정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그것을 알기 위해선 과거의 나를 다시 뒤적여봐야 했다. 대학생 때 보컬동아리 활동을 하며 멤버들과 밤새 화음을 맞췄던 날들, 새로 오픈한 빙수가게에 창립멤버로 합류하여 밀린 주문을 쳐내느라 화장실 갈 새도 없이 빙수를 만들었던 날들, 미래에 대한 걱정은 뒤로하고 무작정 떠났던 독일 교환학생,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이야기들을 다시 회상해 봤다. 도전. 도전을 했을 때 열정을 마주했구나.
'그래, 그럼 도전을 해보자'
나는 사람은 낯선 곳에 아무것도 없이 내동덩이 쳐졌을 때 성장한다고 믿는다. 두려움을 느끼며 쌩고생을 할 때 말이다.
독일은 내게 낯선 곳은 아니다. 교환학생을 하며 반년을 살아봤으니. 하지만 익숙한 곳도 아니다. 독일에서 살 생각을 하니 두려움이 가장 먼저 찾아오는 걸 보니. 그리고 외국에서 학생으로서 사는 것과 직장인으로서 사는 건 전혀 다른 경험이지 않을까. 한편, 독일에서는 한국에서 하던 업무와는 생판 다른 걸 한다. 모두가 유망하다는 직종을 던져버리고 전부터 하고 싶었던 업무를 해보기로 했다.
'독일에서 일하기'라는 도전은 어떻게 끝이 날까. 도전이 항상 성공으로 끝나라는 법은 없지만, 낯선 곳에서 낯선 일을 할 때 많은 것을 배우고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은 경험으로부터 배워서 알고 있다. 거기서 오는 설렘의 감정은 덤이다.
그래서 도전해 보기로 했다. 낯선 곳에서 설레는 감정을 느끼며.
그렇게 한국을 떠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