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삶을 기대하게 하니까
나처럼 프랑스에 살고, 이번에 말라가로 함께 여행을 떠난 친구는 여행 중간에 이런 말을 했다. ‘몇 년 전만 해도 왜 유럽 사람들이 매번 같은 곳으로 여름휴가를 떠나는지 이해가 안 됐거든. 유럽은 크고 가 볼 데도 많으니까 난 항상 새로운 곳을 가고 싶었는데 이제는 왜 다들 갔던 데를 가고 또 가는지 조금씩 알 것 같아. 익숙한 공간이 주는 안정감 때문이지 않을까?’
프랑스는 여름휴가가 길다. 못해도 2-3주는 기본이다. 7, 8월 중 각자 떠나는 날짜는 조금씩 다르고(프랑스어에 이들을 부르는 단어가 따로 있을 정도다. 보통 7월에 바캉스를 떠나는 사람들을 Juillettistes, 8월에 바캉스를 떠나는 사람들을 Aoûtiens라고 한다.), 팀 안에서 떠나는 시기를 약간씩 조율하긴 하지만 아무튼 다들 3주씩은 기본으로 간다. 그래서 7월이 되면 마치 여름방학을 앞둔 아이들처럼 바캉스를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늦게는 9월에 휴가를 가는 사람들도 종종 있지만 바캉스를 떠나지 않는 건 애초에 옵션이 아니다. 이 시기만 되면 빵집, 레스토랑, 카페 등도 예외는 아니어서 3주씩 가게 문을 닫는 경우가 허다하고 파리는 텅 빈 도시가 된다. 이렇게 바캉스 문화가 정착되어 있다 보니 가족 소유의 메종 드 바캉스(Maison de vacances, 우리나라식 표현으로는 별장)를 가진 경우도 제법 있으며 동료들과의 점심시간에는 로또에 당첨이 된다면(이런 상상은 어딜 가나 만국 공통이다)어느 나라, 어느 도시에 메종 드 바캉스를 사고 싶은지에 대한 이야기가 종종 화두에 오른다.
그래서 여름만 되면 그런 분위기에 휩싸여 여행을 떠났고, 목적지는 스페인 바르셀로나, 남프랑스, 그리스 미코노스, 이탈리아 시칠리, 몰타 등 무조건 바다가 있는 곳이었다. 여름 바캉스란 아무래도 그런 것이니까. 바다에서 수영을 하다 쌀쌀해지면 해변가에서 책을 읽으며 태닝을 하다 잠깐 낮잠을 자고, 볕이 너무 뜨겁다 싶으면 다시 찬 바다에 뛰어들기를 반복하다 보면 한나절이 가 있는, 그런 나른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 저녁이면 수영으로 노곤해진 몸을 이끌고 식당에 가서 찬 화이트 와인 한 병과 함께 파리에 있으면 자주 먹기 힘든 해산물을 실컷 먹는 것. 매번 그 뻔한 패턴을 반복하기 위해 기꺼이 비행기를 탄다. 올해는 스페인 남부의 말라가로 떠나기로 했다. 평소보다 다소 늦지만 사람은 덜 몰리는 9월 첫째 주에. 우리가 머문 에어비앤비는 말라가 공항에서 차로 30분 정도 걸리는 곳이었고 운전을 할 수 있는 친구 덕에 차를 렌트해서 편하게 다닐 수 있었다.
매번 뚜벅이었던 전 여행들과 달리 이번 여행에선 차가 있으니까 아무래도 이동 반경이 넓었다. 그래서 첫날은 평소였으면 엄두도 못 냈을 그라나다, 네르하 등 근처 도시 관광을 했다. 이튿날은 에어비앤비에서 차를 타면 30분 거리에 있는 해변가 동네에 가서 해수욕을 하고, 바다 옆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고, 또 다른 해변으로 가 바에서 칵테일을 마셨다. 오후 늦은 시간, 서서히 질 준비를 하는 해가 바다 위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윤슬을 만들어내는 순간, 나는 그대로 위에 입고 있던 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렇게 파도에 몸을 내맡긴 채 해가 지기 직전까지 못다 한 수영을 했다. 온몸을 감싸는 차가운 바닷물과 얼굴에 내리쬐는 하루의 마지막 햇볕, 뜨거움과 차가움의 그 어디쯤에서 때론 천국이 너무 가까이 있다는 생각을 한다. 저녁에는 근처 동네 마트에서 장을 보고 간단한 요리와 안주를 만들어 에어비앤비에 딸린 테라스에서 와인 한 병을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훌훌 털어냈다. 다음 날 아침에는 에어비앤비 내 공용 수영장으로 가 한 시간 동안 짧고 굵게 수영을 하고 마지막 이틀을 보내기 위해 말라가 시내로 향했다. 호텔에 짐을 풀고 가까운 레스토랑으로 가 점심을 먹었고, 피카소가 태어난 곳으로 유명한 말라가에서 피카소 뮤지엄을 방문했다. 각자의 속도로 전시를 본 후, 쉬는 시간을 가졌고 저녁엔 유명한 타파스 바에서 화이트 와인을 한 잔 마셨다. 그곳의 시그니처는 콜리플라워 튀김이라는 생소한 메뉴로 식감이 독특해 씹는 맛이 있었다. 거기에 기름이 팔팔 끓어서 나오는 감바스까지, 아는 맛이지만 그 아는 맛도 극대화되니 혀 끝까지 황홀해졌다.
마지막 날, 스페인에 오면 꼭 맛봐야 하는 추로스를 동네 가게에서 먹고 나보다 먼저 비행기를 타야 하는 친구들과 헤어졌다. 그렇게 호텔 체크아웃을 하고 말라가 해변가를 향해 걸으면서 예상치 못했던 감정을 마주했다. 혼자인 데도 행복감이 몰려와서 이곳은 무조건 다시 와야 하는 곳이구나, 이곳이라면 매년 반복해서 와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말라가에서 차마 해수욕을 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여행에 무언가 아쉬움이 남는다는 것은 그곳을 다시 찾아야 할 이유가 되어주니까.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시내 중심과는 도보로 2-30분 정도 떨어진 바닷가로 가는 내내 한 방향으로 걷던 사람들은 모두 가벼운 옷차림에 비치타월과 물 한 병이 든 작은 배낭을 메고 있었고, 옆구리에는 색색의 파라솔을 끼고 있었다. 일요일 오후가 시작될 무렵, 바다에 몸을 담그는 게 그날의 당연한 루틴인 듯 바다로 향하는 사람들을 보니 이곳이 내 일상의 일부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행복해질 수 있는 단순한 하루하루를 반복하는 삶. 좋은 와인과 맛있는 음식이 있고, 신선한 해산물과 과일이 있으며 언제든 뛰어들 바닷가가 있고, 뜨거운 태양으로부터 날 보호해 줄 야자수들이 많은 곳에서 나는 다시 메종 드 바캉스를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