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 check은 말 그대로 '우천 교환권'이다. 운동 경기나 야외 공연이 비 때문에 취소된 경우에 관객들이 다음에 티켓으로 사용할 수 있는 쿠폰이다. 미국 슈퍼마켓이나 점포에서도 레인 체크를 발행하는데, 세일 중인 상품이 품절된 경우에 이 쿠폰이 있으면 재입고된 상품을 동일한 할인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다.
일상회화에서는 아래 예문과 같이 초청이나 약속에 대한 완곡한 거절을 뜻한다.
Can I take a rain check?
다음으로 미뤄도 될까?
Sorry, I'll take a rain check on our dinner date. 미안, 우리 저녁 데이트는 다음에 하자.
'No, thanks'나 'Sorry, I can't'와 같은 직설적인 거절에 비교하면쿠폰에 빗댄 이 표현은 해석의 여백이 넓다. 확실한 거절이지만 상대방 기분을 배려해 여지를 남기는 예의 바른 응대일 수도 있고, 말 그대로 정말 가고 싶은데 상황이 허락하지 않으니 담에 꼭 같이 가자는 뜻일 수도 있다. 어느 토론 사이트에서 고민남이 자기가 영화 데이트를 신청했는데 여자로부터 'I'll take a rain check'이라는 말을 들었다며 집단지성의 해석을 구했다. 절반은 '희망을 버려라' '다른 여자랑 가라는 뜻'이라 단언했고, 절반은 '다음에 가자고 했으니 아직 가능성은 있다'라고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다음'이 올지 안 올진 그 여자만 알 것이다. 마치 우리가 흔히 말하는 '다음에 밥 한번 먹자'가 아리송한 영역에 놓여있듯이 말이다.
Rain check에는 왠지 시적인 우수가 담겨있다.
"다음에... 다음에..."
수없이 듣고 약속했던 이 '다음에'는 야속하게도 좀처럼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오죽하면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겠다던 오빠조차 나타나지 않고 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지겠는가. 내가 주고받은 레인 체크 역시 기억의 창고에 영수증 뭉치처럼 켜켜이 쌓여있다.
동명 소설을 영화화 한 <Revolutionary Road>는 지키지 못한 약속이 낳은 비극을 그리고 있다. 1948년 레볼루셔너리 로드에 이사 온 평범한 소시민 부부 프랭크와 에이프릴은 쳇바퀴 같은 일상에 공허함을 느끼고 어느 날 파리로 이주할 계획을 세운다. 프랭크는 전쟁 중에 미군으로 파리에 갔던 적이 있고, 그곳에서는 정말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꼈다며 에이프릴을 꼭 거기에 데려가겠다고 이미 약속한 바 있다. 그러나 사표를 내기 직전에 프랭크는 직장에서 인정을 받아 승진을 하게 됐고, 에이프릴은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된다. 결국 안정과 출세를 택한 프랭크가 파리행을 취소하며 꺼내든 카드는 "다음에..."였고 에이프릴은 그의 rain check이 결코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영화의 엔딩은 우리 모두가 아는 바와 같다.
빗속으로 멀어지는 그 사람, 연무 속으로 아스라이 사라지는 나의 희망과 꿈....
아버지가 뇌경색에서 회복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우연히 해외여행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충동적으로 "해외여행 그까짓 것 갑시다. 내가 휠체어 밀면 되지 뭐!"라고 호기롭게 말했고, 여행을 좋아하는 아버지는 환한 얼굴로 "정말? 그래, 가자 까짓것!" 하시며 껄껄 웃으셨다. "아이고, 이래 가지고 가긴 어딜 가겠다고." 건성으로 말리는 어머니도 모처럼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셋이 즐겁게 웃었던 그 순간이 지나고.... 나의 바쁜 일상, 병원을 번갈아 찾으신 두 분... 여행 이야기는 그 후로 누구도 꺼낸 적이 없었고, 나는 그저 생각날 때마다 '다음에... 다음에...'를 마음으로 반복하는 사이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은 훌쩍 흘러버렸다. 부모님은 내가 비단구두 사들고 돌아오기를 얼마나 기다렸을까.... 두 분 모두 멀리멀리 떠나신 지금, 가끔 꿈에서 만나는 부모님은 언제나 나와 함께 어딘가 여행을 하고 계신다....
Rain check...
약속을 담보로 희망을 남겨두지만 돌아올 그 '다음'이 언제인지는 빈칸으로 남는다.
그래서 덩그러니 남아 기다리는 누군가에게 '다음'이라는 말은 참 아플 수 있다.
연말이다.
해가 바뀌기 전에 주머니에 넣고 잊었던 rain check들을 꺼내어 몇 개라도 털어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