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한 자들의 자기소개 그리고 내가 알던 성우가 아니야.
살면서 자기소개를 하는 시간을 종종 겪어왔는데, 항상 느끼는 것은 내 이름이 강 씨나 김 씨가 아닌 게 새삼 감사하다는 것이다. 앞뒤로 내 이름을 지켜주는 성씨(강 씨, 김 씨, 최 씨, 한 씨 들에게 고맙다.)들이 있어서 튀지 않고 무난하게 지나갈 수 있는 성씨를 가졌다. 이번에도 나의 순서는 적당한 중간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 낯선 공간이었지만 크게 긴장되지 않았다. 아무런 연고가 없는 장소에서는 아무렇게나 행동해도 눈치가 보이지 않는다. 내가 사는 공간 주변, 자주 가는 곳, 일명 나와바리에서는 괜히 아는 사람을 만날까 걱정하며 꾸밈없는 행색으로 돌아다니기가 꺼려진다.
그에 비해 스쳐 지나가는 공간에서는 제2의 자아가 얼굴을 드러내듯 더 과감하고 당당하게 행동한다. 나를 모르는 사람들로만 가득 찬 곳에서 또 다른 내가 된다. 이게 진짜 나인지, 나와바리에서의 내가 진짜 나인지는 나조차도 모르겠다. 확실한 건 제2의 자아(?)가 가진 용감함과 당당함을 타고난 기질로 갖고 태어났으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다.
선택적으로 발현되는 용감한 모습으로 자기소개를 해냈다. 강사님이 내가 사는 곳에 대해서 잘 안다며 익숙한 단어들을 몇 개 던질 때 그걸 어떻게 아시느냐고 적당한 호들갑을 떨며 반응했다. 조금 과한 느낌이었지만, 내적 친밀감이 극적으로 상승한 건 사실이었다. 다른 사람은 모르고 우리끼리만 아는 사실을 공유하는 것이야 말로 관계의 간극을 좁히는 탁월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
성우라는 오랜 꿈을 간직해 오며, 이제는 꿈이 아닌 현실로 만들고자 발을 내디딘 직장인.
휴학을 하고 진로 고민을 하는 대학생.
이른 아침 강원도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까지 온 고등학생.
나이도, 성격도, 사는 곳도 제각각인 사람들이 성우의 세계를 경험을 하기 위해 모였다.
누군가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고, 누군가에게는 황금 같은 휴일을 반납할 만큼 간절했다.
마음의 경중을 떠나 타인의 권유나 강요가 아닌 순수한 선택으로 이 자리에 모인 우리들이었다.
그래서였을까. 교실에는 설레는 긴장감, 따뜻한 열정의 기운이 감돌았다.
자기소개를 마치고 성우라는 직업에 대한 설명이 시작되었다.
목소리와 발음이 좋고, 변성을 잘하면 성우라는 직업에 도전할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아는 것과 달리 성우의 세계는 넓고도 깊었다. 그저 만화주인공처럼 귀엽고 신기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 다가 아니었다.
캐릭터의 감정을 온전히 이해하고 몰입하여 표현하는 일, 그것은 인간에 대한 관찰과 연구의 한 장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알면 알수록 성우라는 직업은 고차원의 가치를 추구하고 생산해 내는 일이었다.
그런 일을 내가 감히 할 수 있을까? 내가 추구하는 가치와 동일한 선상에 있을까?
부딪히지 않았다면 할 수 없었던 고민을 품게 되었다.
흐릿한 세상의 한 꺼풀을 벗겨내어 그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제2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