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예전에 이미 한 번 봤었는데, 그때는 사실 잘 와닿지 않았다. 내 생각이나 감정도 지금과 같지 않았고. 가타카를 처음 봤을 때 나는 꽤나 염세적이며 그것이 '쿨'하다고 생각하는 풋내기 20대였으니 그럴만도 하다. 딱히 지금 풋내기가 아닌 건 아니다만...아직도 응애지만...아무튼.
괜히 멋부린다고 아무 공책이나 꺼내 감상을 휘갈기며 영화를 봤는데, 남은 것들이 다 이 모양이다.
'제롬이 집에서 편한 옷 좀 입으면 좋겠다', '주드 로 잘생겼다', 'upset이라고 하지 않았나 미쳤다고 하네', '그렇게 주사 자주 놨는데 바늘 자국이 하나도 없냐', '렌즈 끼고 자면 눈알 빠질 거 같던데', '제발 지금 왼손 오른손 뭐요?', '우주복 안 입으시나요', 기타 등등. 기타 등등...
다시 읽어보니 혼자 하는 왓챠파티와 다를 바가 없다. 여기서 그나마 브런치에 남겨도 될만한 거를 건져야 한다니. 마치 불량품 100개 중에서 괜찮은 거 하나를 뽑아야 하는 기분이다.
...우생학에 근거하여 자연임신을 거부하고 최고의 인자만 남기는 것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면 어떡하지.(당연히 나는 우생학을 반대한다...)
쿨타임만 찼다 하면 커뮤니티 등지에 반복적으로 업로드되는 글감이 있다. <가난한 자나 장애인은 아이를 낳지 마라.> 종의 다양성이 종족 보존에 훨씬 유리하다는 건 이미 과학적으로 입증된 사실이지만 우리는 세상을 너무 희미하게 인식하는 바람에 종의 다양성 같은 거는 감정적으로 반대하는 것 같다. 가타카를 보며 빈센트라는 개인은 응원하지만, 유전자 검사를 통해 최고의 인자만 남기는 디스토피아 사회의 편린이 우리 세상에 도래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혼재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심정적으로. 틀린 감정은 존재하지 않으니 그 심정 자체는 이해할 수 있겠다...빈자의 자식, 장애인의 자식으로 태어나 '열등한' 신체적, 혹은 사회적 인자를 가지고 태어난 이들의 심정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 나는 그 경험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사자성을 지닌 이들에게 무어라 하기는 어렵겠다. 허나 그들의, 그들의 부모의 존재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감정에 맞고 틀리고가 없듯 존재에도 맞고 틀리고는 없을 거다. 존재는 그냥 태어날 뿐이다. 탄생이 죄인가? 존재를 증명하는 방법은 선택이라 생각한다. 왜, 모 웹툰에서 다가오는 문을 계속 여는 게 삶이라는 대사도 나오지 않던가...인생이라는 길을 걸어갈 때, 한 번에 하나의 문만 다가오지는 않을 거다. 물론 그런 순간도 있겠지만. 대개는 어떤 하나의 순간에 여러 개의 문이 다가와 어떤 문을 열 것인지 고민하는 시간이 더 많으리라 여겨진다.
감독관을 살해한 범인에게 폭력성 인자는 없었다. 그런 인자는 없었지만 범인은 가장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선택을 내렸다. 가타카의 세계관에서는 존재의 우열과 옳고 그름을 평가하는데, 그 세계에서 옳은 존재가 그른 선택을 내렸다. 존재가 존재하는 그 자체로 평가할 수 없다. 존재의 선택은 사회구조 속에서 그 사회의 윤리규범에 적합한지, 적합하지 않은지 평가받을 뿐이다.
살아가는 데에 이유는 없다. 탄생은 이유를, 적합 여부를, 존재의의를 부여하지 않는다. 존재는 선택해야한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그러면 사회의 규범이 윤리적인지 아닌지 평가하는 건 어떻게 해야하는가? 사회규범은 불변이 아니다. 당장 세계인권선언도 100년이 채 안 된 따끈따끈한 선언 아닌가? 여성이 참정권을 얻은 것도 겨우 100년 남짓 된 이야기다. 봉건제가 철폐된 것도...음...아니...봉건제는 아직 남은 거 같기도 한데...아무튼 형식으로써의 봉건제도 인류 역사에 비춰보면 사라진지 얼마 안 된 개념이다.
사람을 둘로 나누면 뭐랑 뭐로 구분하겠냐는 질문이 트위터에서 간헐적으로 플로우를 타고 돌아온다. 사람을 둘로 나누면 죽어요. 사람을 둘로 나누면 좌파와 우파. 솔로몬. 나랑 다른 사람. 규범을 기준으로 했을 때에도 여러 가지 구분법이 있겠지만 여기서는 규범 안의 사람과 규범 밖의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기존 규범에 질문을 던지고 견고한 조직체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조직체 안팎에서 동시에 벽을 두들기는 게 혼자서 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일 거다.
규범 안의 사람 제롬. 규범 밖의 사람 빈센트. 그러나 각자 어떤 이유로 규범을 넘나드는. 제롬은 생득적으로 규범 안의 성질을 갖고 태어났으나 스스로의 선택으로 규범 밖에 튕겨나갔다. 빈센트는 규범 밖의 성질을 갖고 태어났지만 제롬의 생득적 성질로 스스로를 위장해 규범 안으로 넘어갔다. 이 규범은 정말로 유효한가? 사회에서 옳고 그름, 적합과 부적합을 가르는 이 얇은 선이 정말로 유의미한가? 한 사람만 있으면 불가능한 일이 둘이 있어서 비로소 가능해진다. 넓은 시각에서 봤을 때 이는 일종의 연대가 아닐까 싶다. 규범에 따르면 둘은 '공범자'로 칭해지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낡은 사회의 규범에 의거했을 때에나 할 수 있는 말이다. 결국 사회규범을 어겼기에 각자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내지 않았던가...
법은 영원하지도 절대적이지도 않다. 존재 자체에 옳고 그름은 없겠지만 인간이 만든 것에는 대체로 이유가 있다. 우리는 계속 인간이 만든 것에 질문을 던져야한다. 그것은 지금도 유효한지를.
인간은 누구나 페르소나를 쓰고 산다고 했는데...빈센트가 제롬의 신분을 뒤집어쓰고 아이린과 관계를 맺는 과정을 보며 나의 경우를 따져볼 수밖에 없었다. 특정 감정이나 상황이 제시되면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경험을 돌아보기 마련 아닌가...(아니라면? 나같은 사람이 그런 것으로.)
사랑을 사랑으로 표현하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다. 사랑은 자기 자신의 진실된 모습을 보여줘야 가능하고, 계속해서 가꿔갈 수 있으니까. 연인 앞에서도 나를 있는 그대로 진실되게 보여주지 못한다면 사랑은 거기서 끝이다. 계속해서 사랑을 위장해야 한다. 위장된 사랑은 반드시 끝이 존재한다. 지난 연애의 결말이 그랬던 것도 여기서 기인하는 것 같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나를 보여줄 수 없었다. 내가 상대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건...아닐 거다. 상대와의 경험이 쌓일수록 나는 그와의 차이를 느꼈고, 이를 말했을 때 그가 보일 반응이 두려웠다. 그냥 말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생각해보아도...그건...그냥 가정이다. 나는 결국 함구하기로 선택했고 당시와 같은 결말을 맞았다.
'나'를 드러내는 건 너무나도 두려운 일이다. 내가 누구인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존재인지 알리는 건 무서운 일이다. '모든' 것을 보여줘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사랑만큼은 거짓을 숨길 수 없다.
빈센트가 아이린에게 자신의 '모든' 것이나 다름없는 머리카락을 주는 장면이 그래서...놀라웠다. 하지만 이미 빈센트는 아이린의 집에서 아이린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줬다. 이래도 나를 사랑해줄 거냐는 초라한 고백. 언제나 심금을 울린다.(단, 현실에서는 앞으로의 개선 계획을 꼭 알리도록 하자...뭐, 빈센트는 의지 EX니까 그 이후 아이린을 속인다든지...하는 일은 없을 거 같지만...)
언제쯤 나는 나를 세상에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 있을까? LCSI 검사를 했을 때 사람들이 보는 나랑 내가 보는 나의 모습 사이의 괴리를 기억한다. 그 간극은 언제쯤 좁혀질까...좁혀질 수는 있을까...
마지막 치킨 게임 장면부터는 정말 줄줄 울면서 봤다. SF는 정말로 정말로 인간에, 인간 삶에 대한 이야기다. 염세적인 척~~~ 세계관을 조형해도 사랑이 없으면 좋은 SF는 나오기 어려울 거다. 문단에 괜히 SF붐이 일어나는 거도 아닐 거다. 사랑이 없는 세계에 우리는 사랑을 계속 경험하고 싶다. 타인의 삶을 빌려서라도, 타인의 이름에 나를 투영시키더라도...
일주일에 한 편 정도는 이렇게 영화를 쪼개서 볼 수 있지 싶다...어쩌면 이것도 내 말뿐인 계획일지도 모른다...하지만 어딘가에 이렇게 써두면 진짜로 할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