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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s Meer Mar 26. 2024

음악과 자기혐오

피아노를 좋아하려 노력하는 사람의 넋두리.

이 세상이 망하고

암흑만이 남았을 때.

나는

밝고 환하고

빛나고 뜨거운

그대를 찾아내기 위해

온 지구를 뒤질 거다.

만약 그대가 지구를 떠났다면,

나로부터 멀리멀리 떠나

므두셀라 별을 밝히게 됐다면


나도 어떻게든 갈 것이다


어렸을 때 나는 자신감이 넘쳤었다. 지금 생각하면 멋모르던 시절, 무지에서 비롯된 용기가 아니었나 싶다. 무대에 올라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은 내가 좋아하고 즐기는 일이었고, 사람들에게 나를 뽐낼 수 있는 기회였다.

피아노를 전공으로 삼기로 결정한 후, 해가 갈면 갈수록 자신감이 떨어졌다. 피아노에 대한 자신감은 물론이고 나 자신에 대한 믿음까지 증발했다. 나는 생각보다 피아노를 잘 치는 사람이 아니었다. 무대에서 말 그대로 ‘조진’ 적도 꽤 여러 번이다. 예중에서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실기 성적이 중간쯤에 머물렀다. 슬럼프는 밥 먹듯이 찾아왔고 나는 점점 지쳐갔다.

사실 생각해 보면 피아노를 전공한 이래 모든 해, 모든 순간이 다 슬럼프였다. 나란 인간은 잡생각이 왜 이렇게 많은지, 나는 손이 왜 이렇게 작을까, 소리가 왜 이렇게 작을까, 테크닉이 왜 이렇게 안될까 -부터 시작해서, 계속된 실패로 인한 절망감으로 염세주의에 빠지기 시작한 이후로는 아예 '음악을 왜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하양 까망 나무조각 달린 고철덩어리 아무리 두들겨봤자 지구상에 남는 거 하나 없다!' 이런 생각에 휩싸여 피아노를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는 시절이 있었다.



예고 1학년, 극심한 슬럼프에 빠졌다. 끝없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피아노 실력에 레슨 선생님께서는 경악을 금치 못하셨다.

나도 나에게 경악했다. 내가 그토록 나약하고 한심한 인간이었다는 사실이 수치스러웠다. 그 당시 나는 피아노를 보면 온갖 종류의 공포감에 휩싸이곤 했다. 그냥, 피아노가 무서웠다. 피아노는 나에게 온갖 고통을 안겨주는 존재였다.

피아노를 배우는 목적을 잃은 나는 어떻게든 피아노 치는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고 갖은 애를 썼고, 클래식 음악도 멀리했다. 결국 그 과정에서 연습시간도 현저히 줄고, 작품도 제대로 익히지 못했다.

그 당시에 ‘피아노가 무섭다’는 속마음을 주변에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공감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 같다. 예고 동기들도, 선생님도.

예고 학생들은 야망이 컸다. 실력이 좋은 친구들은 더욱더 잘해보고자 하는 열정이 넘쳤고, 실력이 부족한 친구들도 끈질긴 의지로 노력하고 또 노력해서 결국에는 해냈다.

그 아이들에게 악기란, 조금 스트레스를 유발할 수는 있어도 자신에게 가장 큰 행복을 가져다주는, 그리고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소리를 선사하는 존재였다. 난 그들의 세계에서는 불청객이나 다름없었다.



고 2가 되었다. 이제 슬슬 대학 입시를 준비해야 했다. 언제까지나 뒤처져 있을 수 없었다. 피아노를 다시 좋아해야 하고, 자신감도 다시 키워야 했다. 나에 대한 믿음, 사랑도 어떻게든 발생시켜야 했다.

차분히 마음을 먹고 다시 시작했다. 나의 멘탈은 내가 책임져야 하니까. 나를 구원하는 것도 결국 나라는 생각으로 바보같이 단순하고 성실하게 살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슬럼프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나는 구렁텅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피아노를 다시 할 이유를 찾게 해 준 것은 그저, 사소한 관찰과 작은 깨달음이었다. 존경하는 예술가들, 그리고 내 주위의 동기들을 가만히 지켜보면서, 저들이 예술을 왜 좋아하는지, 왜 배우려 하는지, 어떻게 시행착오를 겪고 어떻게 장인 匠人으로 거듭나는지 관찰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음악, 아니, 예술을 위해 희생하는 삶.

그것은 어찌 보면 예술가의 의무다.

안 되면 되게 하고, 벽이 있음을 알아도 계속 부딪히는....

누가 보면 맹목적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한결같고 억척스럽게 예술을 갈고닦는 삶.

빛을 받지 못한 채 음지에 갇히더라도 나만의 예술을 계속 갈고닦는 삶.

사실 이게 전부다.

그리고 이게 답이었다.

음악은 정말로, 미치도록 좋아하지 않으면 하기 어렵다.

피아노가, 음악이, 인생이 나를 아무리 고통스럽게 하고 상처 입게 만들더라도 끝까지 놓지 않는 사람만이 이긴다.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좋아하기 때문에 떠나지 않는 것.

나는 이게 견디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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