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공허해서, 멍하게 아무 의미 없는 영상이나 보다가, 온몸이 비명을 지를 만큼 피로를 견딜 수 없으면 그제야 잠드는 날이 많아졌다.
그게 아닌 날은 또 마찬가지로 몸이 도무지 버텨내지 못할 때까지 꾸역꾸역 일을 하다가 퇴근한다.
쇠약해진 몸을 그 따위로 굴리니 체력이 더 떨어질 수 밖엔.
복귀한 직후 급히 처리해야 했던 일은 수천억의 사업적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행정사건이었다. 이런 사건이 흔히 그러하듯, 속내는 경쟁업체들끼리에 경제적인 다툼이지만 소송은 법령의 자구 하나하나의 해석을 다투는 모양새가 된다. 하나하나 별 치졸스럽다 싶은 부분까지 다투고 다투고 또 다투면서 벌써 이번이 몇 번째 소송이던가...
장례를 치르고 돌아와 이 사건을 또 들여다보고 있자니,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나 이런 사건해, 하고 남들 보여주기에나 좋지, 이게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이 사업권을 누가 가져가든, 그래서 부자가 되는 게 누구이든. 다 무슨 상관이냐고.
아이가 쓰러지기 전날 밤에도, 쓰러져서 차갑게 식어가던 날에도 나는 이 사건에 매달려 있었다. 첫 번째 자책은 그런 것이었다. 내가 변호사가 아니라 전임 사역자였다면, 나는 그 밤에 너를 보러 갔을까. 네 영혼을 좀 더 여유 있고 성숙한 사람이 돌보았더라면, 혹시 너의 마지막이 달랐을까.
장례를 마치고 돌아와 보니 또 그 사건이 부메랑처럼 돌아와 있더라. 나는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밤을 통장잔고를 불려주는 것 이외엔 아무 의미도 없는 사건들, 법령의 꼬투리를 잡는 데에, 혹 그런 꼬투리들을 방어하기 위해 시간을 쏟으며 보내야 하는 걸까. 내가 함께 시간을 보내어야 했던 사람들을 제쳐두고서.
그러나 생각에 오래 빠져있을 틈도 없었다. 내가 무력하다고 다른 사람 사업을 망칠 수는 없는 것이고, 그러므로 일은 어떻게든 해내야 했다.
여전히 그렇게 살고 있다. 사건이 너무 많이 밀렸고, 당장 멈추고자 해도 그건 일단 급한 불은 끄고 난 다음일이다. 그런 고로 나는 지금 오직 기능으로만 남아있다. 그게 별로 유감스럽지도 않다. 다만 피곤하고 피곤하고 또 피곤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