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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바다거북 Oct 19. 2023

네게 허락하지 않음이 은혜라.

대학을 졸업하고 첫 1, 2년은 아마 처음 해보는 사회생활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고서 얼마 지나지 않아 공황상태가 왔다.

매년 해가 바뀌면 학년이 올라가고, 또 때가 차면 졸업을 해서 다음 단계로 진학을 하고.

매년 주어지던 목표와 과업이 사라졌다.

나는 그 직장에서 좋은 고과를 받아 승진을 하길 바라지 않았다.

임시로 머물 곳이라고 여겼으니까.

하지만 이곳이 임시로 머물 장막이라면 나아갈 곳은 어디던가.

그리고 그것을 위해 나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답을 찾을 수 없었고, 그런 목표의 부재가 무척이나 고통스러웠다. 

그 막막함, 불안, 외로움이 얼마나 컸던지 나는 그때를 결코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때로 기억한다. 

젊음 따위는 그립지도 탐나지 않아.


나는 그 시기를 예배당 바닥에서 울고, 기도하며 보냈다.

그래도 비전은 없었다.

이름 없는 촌부로 살다 죽어도 좋다는 마지막 고백을 받아내신 후에야 떠돌이 생활이 끝났다.


아이러니한 건, 그런 고백을 안고 퇴사를 결심한 직후에 

오히려 회사에선 온갖 굵직한 프로젝트들이 벌어졌고, 거기에 소용돌이처럼 휩쓸려가 일하느라고 퇴직이 늦어졌다. 그 시기에 지난 6년간 배웠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겪으며 성장했고, 이듬해 예정에 없던 승진을 했다. 가장 많이 인정받고, 안정되어 있던 때. 어디서나 사랑받고 환영받으며 일하던 때.

사랑했으므로 아쉬움은 있었지만, 아깝지는 않았다. 미련도 없었다. 망설임 없이 떠났다.


퇴사 후 로스쿨에 진학할 때, 직업에 대한 선망은 없었다.

경력이나 경제적인 측면에서의 영광은 전 직장에 있을 때와 같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심지어는 그냥 자격증을 사용하지 않고 결혼해 엄마로만 살아도 좋다는 다짐,

이제 내 삶은 오직 하나님이 허락하신 자리에서 허락하신 사람들과 사랑으로 더불어 사는 일에만 목적을 두겠노라는 고백. 


비전을 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까지 내려올 수 있었던 것을 은혜라고 말한다.



... 그때는 훌륭한 경력을 갖는 것보다 결혼이 더 힘든 일이 될 줄 몰랐다.

내가 더불어 살길 소망한 공동체는 점점 더 풍전등화 같고, 

결혼 역시 막막하다.

20대 때, 막막함에 예배당에 주저앉아 울고, 기도하던 때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일 년, 일 년 응답 없이 꼴깍꼴깍 나이를 먹어가는 것에 대해 무척 불안해한다. 



정작 가장 간절했던 소원들은 하나님이 들어주신 적이 없다. 

아무것도.


가족의 고통이 너무 커서 그 고통 중에 하나님을 만났다. 주 예수를 믿으면 너와 네 가족이 구원을 얻는다더니, 나는 믿음의 크기만큼 더 커진 고통을 대면해야 했다.

비전을 달라고 구했더니, 숨은 허영과 사심 한 톨까지 다 털어내시곤 너는 그냥 예배자로만 살라 하셨다.

전도의 열매와 공동체의 부흥을 갈망했으나 영혼을 잃기만 하며 십수년째이고, 

심지어는 가장 사랑하여 곁에 둔 생명을 거두어 가셨다.

가정을 이루게 해 달라 간구했더니, 또다시 익숙한 침묵.



가족의 문제가 그토록 크지 않았더라면 나는 내 인격의 밑바닥을 아직 못 보았을 것이다.

비전을 주셨으면, 그것이 우상이 되어 달려갔을 것이다.

적당히 굴러가는 공동체, 그 안에서 맡겨진 역할들을 감당하면서 칭찬받는 자매로 살았더라면 나는 이토록 치열하게 내게 맡겨진 영혼들에 대한 책임과 영적인 열매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원했던 시기에 가정을 이루었더라면, 사람들이 기대하는 생애주기의 단계를 충실히 밟아, 당연한 듯 받아들인 삶의 레일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네게 허락하지 않았던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은 네게 은혜라고.

네가 모든 것을 내던지고 이곳으로 내려올 결심을 하게 되었을 때에, 그 뒤에 따라오는 삶을 겪어 본 후에 

<고통스러웠던 하나님의 침묵이 사실은 내게 은혜>였다고 고백하였던 것처럼,

현 시점에서 미완의 기도제목들 역시 마찬가지가 될 것이라고.

여전히, 아직도, 이 모든 것을 네게 허락하지 않음이 네겐 은혜라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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