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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터 파파넥, <인간을 위한 디자인>을 읽고

욕망을 분해하고, 기술을 정제하고, 구조를 횡단하는 디자인 - 유규희

1. 들어가며

디자인이란 얕게 이야기하자면 인공물의 외관을 보기 좋게 만드는 것이다. 산업 디자인은 인공 입체물의 형태와 구조 및 소재를 설계하고, 시각 디자인은 평면에 입혀지는 인공물의 조형과 시각적 내러티브를 설계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디자인을 극히 좁은 분야로 받아들일 때의 이야기다. 직접 디자인 과정에 참여하는 디자이너는 이런 얕은 정의를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디자인은 인간의 욕구가 주어진 사회 구조 속에서 어떤 형태를 갖추어 발현할지 결정하는 일이다. 디자이너에게 디자인이란, 인간을 둘러싼 수많은 요소로부터 발생하는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는 일이어야 한다.


2. 인간을 위한 디자인

빅터 파파넥의 <인간을 위한 디자인Design for the Real World>은 보다 깊은 의미에서의 디자인이 주요하 게 다뤄지지 않던 20세기 후반, “인간을 위한 디자인”의 관점에서 당대 디자인 업계의 흐름을 조목조목 비 판하고(1부) 디자이너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2부)한 책이다.

두 차례에 걸친 산업혁명으로 상품의 대량생산이 업계 표준으로 자리잡으면서, 현대 사회에는 자본주의가 뿌리내리기 좋은 토양이 일구어졌다. 계몽주의라는 구름에서 근대화가 내려 땅을 적시면, 나무에서는 필연적으로 소비주의의 열매가 자라난다. 시장에 내놓은 상품은 늘 경쟁력을 가져야 한다. 이때 경쟁력을 부여해주는 요소는 값싼 원자재와 제작의 효율화를 통한 가격 절감, 그리고 소비 욕구를 불러일으킬 만한 상품성이다. 여기서 상품성이란 진실된 디자인이 추구해야 하는 상품의 충실한 기능 수행이 아니라, 생산자인 기업에 의해 철저히 만들어진 개념에 가깝다. 기업은 특정 상품을 소비하지 않으면 뒤떨어진 것처럼 느끼도록 유행을 설계하고, 더 잘 쓰이기 위한 상품이 아닌 더 잘 팔리기 위한 상품을 기획한다. 시간축에 대하여 종으로는 유의미한 기술적 발전이나 재구성 없이 약간의 변주만을 준 새 상품을 출시하여 주기적으로 세대 교체가 일어나도록 하고, 횡으로는 몇 가지 자잘한 기술을 넣고 빼는 것만으로 여러 버전을 출시해 불 필요한 선택지를 늘리기도 한다. 이때 소비자에게 필요한 상품이 무엇인지, 상품이 쓰이면서 건강이나 환경 상의 문제를 야기하지는 않는지, 또 상품의 제작이 자체적으로 이뤄질 수 있는지 등은 고려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3. 진짜 세상을 위한 디자인

빅터 파파넥이 책 전반에 걸쳐 강조하는 지점 중에서도 핵심적인 것은 “통합적 과정으로서의 디자인”과 “제너럴리스트로서의 디자이너”이다. 건전한 디자인을 위해서는 인간과 제품의 상호작용 원리, 그것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자연적 환경에서부터 총체적으로 사고하기 시작하여, 제품의 목적에 따라 수많은 학문적- 경험적 정보를 고려하고, 나아가 디자인 프로세스가 해당 국가의 적정기술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며, 그 제품이 다시 사회적-자연적 환경에 미칠 영향까지 거시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디자이너는 공학, 생물학, 사회학, 경제학 등 다양한 학문 및 소비자 간의 접착제 역할을 수행하며, 이때 요구되는 자질이 제너럴리스트의 능력이다.


3-1. 제너럴리스트로서의 디자이너

디자인은 소비자의 필요-욕망과 기술-자본이 협상하는 과정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다양한 분야를 통합하고 엮고 아우르는 능력이 필수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빅터 파파넥은 디자인팀이 언제나 다학제적으로 구성 되어야 하며, 그럴 때에야 애초부터 잘못된 디자인을 막을 수 있다고 보았다.

한 팀의 디자이너는 아마 심리학자보다 심리학에 대해 훨씬 잘 알지 못할 것이고, 경제학자보다 경제학을 훨씬 잘 알지 못할 것이며, 어쩌면 아주 약간 정도는 전자공학을 알지도 모르지만 그는 전자공학도보다 더 많은 디자인 과정에 대한 심리학적 이해도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디자이너는 여러 학제간의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디자인은 징검다리이며,

쾨슬러는 (...) 충돌의 행위를 통한 새로운 통찰을 정립했다. (...) 그가 정의하는 창의적인 행동의 작동 방식은 대단하다. “창의적인 행위는 이전에는 연관되어있지 않던 구조들을 조합하여 자신이 투입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불시에 얻어내는 것이다.”

따라서 창의적이어야 한다.

빅터 파파넥이 고상한 예술로서의 디자인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다고 본다. 디자인은 개인의 독창성을 마음껏 펼치기 위해 창의적인 것이 아니라, 그 지위상 연결되었던 적 없던 것을 연결하거나, 기존의 연결을 재정립하며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는 일이기 때문에 창의적인 것이다.


3-2. 디자인의 역할

디자이너는 인간의 욕망과, 현재 기술과, 주어진 사회 구조가 맞물리는 위치에서 섬세한 조정을 통해 그 이음새를 설계한다. 이 이음새는 세 가지 축이 서로를 받아들이는 방식을 결정한다. 욕망이 필요를 넘어서 버릴 만큼 무럭무럭 키워지도록 두어서는 안 되며, 첨단 기술이 너무 날카로운 나머지 법과 사회와 사람들을 찌르게 해서는 안 되고, 사회와 환경이 인간과 기술을 무심히 내려다보지만은 않도록 끊임없이 거리를 좁혀 주어야 한다. 디자인은 욕망을 정제하고, 기술을 가공하고, 구조를 횡단하는 과정이다.


4. 맺으며

오늘날 우리는 우리가 진정 필요로 하는 것과 욕망하는 것을 구분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표면적 개인주의화로 모든 문제의 첫 번째 원인은 구조가 아니라 나 자신이 되어버렸다. 모서리를 자르다 못해 벼려진 첨단 기술인 인공지능은 인류에게 도움이 되기 위한 본래의 목적을 잃어버리고 몇몇 집단의 수익화 도구가 되어 도리어 인간을 찌르고 있다.

그러나, 그래서, 여전히 디자인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디자이너는 새로운 기술이 개발되기를 기다릴 만큼 인내심이 좋지도 않으며 사회 구조의 근본적 변혁을 이끌어낼 만큼 목소리가 크지도 않다. 그러나 점점 더 다양한 분야가 충돌하고 분화하는 만큼 그 사이 중개자로서 디자이너의 역할은 절대 사소하지 않다. 디자인은 당장의 문제를 짚어내고, 그것을 일차적으로 봉합하는 응급처치를 한다. 또 고도의 기술이나 정책 없이 변화를 일으킨다. 우리가 진정성 있는 디자인을 위해 노력한다면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음새를 봉합하는 전문가로서 자부심과 책임감을 동시에 가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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