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디자인과 새내기는··· - 엄가을
알고 있는 감각이지만 글이 정확하게 이를 언어로 짚어낼 때, 그로 인해 공명할 수 있을 때. 그런 순간들을 가장 좋아한다. 한 학기, 그리고 여름방학 조금을 더한 기간 동안 어떤 것들을 느끼고 배웠는지 일종의 공명을 기대하며 글을 적어 본다.
1. 학교
학교생활은 어떠냐, 만족하냐, 다녀보니까 어때요? 자주 듣는 질문이다. 그러면 보통 좋은 것 같다고 답한다. 사실이다! (아마?) 좋다고 답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학교는 나에게 대학생이라는 신분과 최소한의 소속감을 제공한다. 동시에 구성원으로서 참여할 수 있는 여러 기회들을 제공한다. 이 기회들을 잡았을 때 귀중한 인적 교류가 발생하기도 한다. 또한 배우고 싶은 분야의 수업을 선택해서 수강할 수 있다. 디자인 작업을 비롯한 각종 창작을 위해 지식적 인풋과 영감이 필요한 나에게는 교양 수업을 듣는 것도 유익한 시간이었다. 이처럼 많은 경험들은 학교를 통해 발생한다. 동시에 많은 경험들은 학교 밖에서 발생한다. 학교는 테두리를 제공하는 것이고, 그 안을 채우는 것은 나의 몫이다. 미술대학 1학년 전공선택 수업도 마찬가지이다. 수업에서는 형식을 제시한다. 형식 안 내용은 이미 내 안에 떠다니는 생각의 형태로 어느 정도 존재해야 한다. 그 내용은 일상을 어떻게 운용하냐에 달려있다. 수업보다 도서관에서 집어 든 한 권의 책, 어느 날 본 영화, 혼자 걸었던 공원의 풍경 등이 더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또 다른 커뮤니티를 통해 배우는 것도 내용을 채우는 하나의 방법이다. 최근에 매료되었던 것은 워크숍이다. 북 바인딩, 필름메이킹, 사운드 디자인 등 그 종류도 다양하고 만날 수 있는 사람의 풀도 넓어진다. 규모와 무관하게 배움과 가치를 나누려는 사람들이 학교 밖에도 많이 있음을 알게 되면 스스로가 고무되기도 하고, 새로운 재미를 경험할 수 있다. 여기서 배운 것들을 다시 작업에 활용하곤 한다.
2. 디자인
학기가 끝난 지금, 내게 남아있는 것들은 캔버스 3개, 대략 한 마쯤 될 천 하나, 저장명이 .psd나 .ai로 끝나는 파일 몇 개, 신체 움직임이 담긴 영상, 16mm 필름, 실이 꿰매진 A4용지 21장, 그리고 앞서 언급한 것들을 준비하고 남기기 위한 수많은 기록이다.
작업을 정리하고자 사진을 한 데 모아놓았더니 참 이질적인 결과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재료도 다양했고, 온전히 타인을 위한 작업도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디자인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작업을 위해 동원한 나의 디자인적 사고가 동일하다는 점에서이다.
디자이너는 어떤 일을 하는가? 툴을 통한 구현이나 리서치를 통한 서비스 제공 등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입시를 위해 정립했던 디자인관은 “디자인은 타인을 고려하는 것이며, 그 지점에서 순수미술과의 차이가 발생한다”이었다. 면접을 준비하면서 디자이너 관련 질문을 창작자의 태도와 엮어 답변했더니, 그렇게 말하는 것은 디자인의 본질을 흐리는 것이라는 피드백도 받았다.
물론 타인을 고려하는 것은 디자인의 본질임을 알고, 실무에서는 분야와 시스템이 정립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디자인은 나에게 생각을 표현하는 도구일 때 가장 흥미롭다. 아직은 표현 대상이나 창구를 가리지 않고 이 분야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싶다.
3. 작업
• 무언가로부터 회피하고 있지 않은가?
• 영감에 너무 많은 것을 기대고 있지 않은가?
• 시각언어보다 텍스트를 더 중점으로 두고 있지 않은가?
• 시각화가 아이디에이션에서 발생했던 흥미로운 생각들을 제대로 담고 있는가?
그림도 그려보고, 과제전도 해보고, 워크숍을 통해 타인의 디자인 방법론도 적용해 보며 던진 질문들이다. 이 질문들을 하나하나 짚어보려고 한다. 작업을 진행하다 보면 결국 나와 마주하게 된다. 나에게 비평을 쓰는 행위와 소설을 쓰는 행위는 다르다. 디자인은 내게 비평으로, 순수미술은 소설로 치환된다. 이미 존재하는 지식을 해석하고, 융합하고, 변형하는 행위는 비교적 익숙한 반면, 내 세계를 나만의 개성으로 구축하는 행위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렇기에 계속 무의식적으로-혹은 의식적으로-이를 회피해왔다. 이번 서양화 수업에서는 내가 회피해오던 것을 마주할 수 있었다. 한편으로, 여러 작업을 하며 방법론을 재고하게 되었다. 나의 작업은 대부분 읽었던 책, 감상했던 전시 등에서 출발한다. 누구에게나 영감을 얻는 과정은 있다. 그러나 작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나의 관점을 거쳐 영감은 희석되어야 한다. 나의 경우 영감을 받았던 창작물에서 개념을 직접적으로 빌려오곤 한다. 다른 창작물과 상호 연관성을 맺고, 흥미로운 개념을 활용하는 능력은 강점이 될 수 있지만, 내가 가진 방법론적 한계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시각화에 관한 질문이다. 이미지와 텍스트 중 나에게 더 편한 표현 수단은 무엇일까, 종종 생각한다. 시각언어로서 온전해야 할 작업물을 텍스트로 완성하려는 습관이 있다. 이는 작업 구상 단계에서 발생한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결과물이 온전하게 담지 못해서이기도 하고, 텍스트가 나에게 훨씬 익숙한 매체라서 그렇기도 하다. 이제는 텍스트의 비중을 줄이고 나만의 시각언어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을 연습하는 중이다.
이렇듯 강점이든 약점이든 우리는 작업을 통해 모든 것을 고스란히 돌려받게 된다. 이 과정을 거듭하다 보면 각자의 색에 대한 방향을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대학-소속 분야-작업 순으로 이야기를 좁혀가며 후기를 써보았다. 많은 사람이 공감할 만한 대학이라는 주제부터 작업에 관한 사적인 생각까지 다루어보았다. 그래서인지 ‘나’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빈도수가 갈수록 많아진다. 그렇지만 사적인 이야기가 어쩌면 가장 강한 공명을 불러일으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위에 적은 생각들은 당연히 정답이 아니다. 한 사람이 택하는 길에 따라 그 정답이 만들어진다. 매번 같은 질문을 반복하고 있지만 그 답은 조금씩 달라진다. 지금 이 시기여서 할 수 있는 생각들이 있다. 앞으로 택할 길에 따라 앞선 생각들이 조금씩 변화할 것을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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