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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에서 정치적 디자인을 추구한다는 것은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 조지 오웰 - 조정연

“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 ”, 조지 오웰


왜 디자이너는 알아야 하는가

디자인은 주어진 목적을 조형적으로 실체화하는 과정이다. 디자인은 소통이라는 구실을 하며 여기에서 목적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우리는 전하려는 메시지 이외의 요소는 공정하게 다룰 수 있다는 신념을 지니고 있지만, 디자인 이론가이자 철학자인 토니 프라이는 모든 디자인은 현상 유지에 기여하거나 현상을 전복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면에서 모든 디자인은 정치적이라고 할 수 있고, 디자이너들은 본인의 디자인이 해석될 수 있는 이데올로기적 배경들에 대해 이해해야 할 필요성이 생긴다. 이것은 디자인을 하는 과정에서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가치판단의 도구가 되기에 우리는 어떤 방향으로든 적극적인 의식을 내면화하고 있어야 한다. 이 글에서 필자는 디자인의 필연적인 정치적 측면에 관해 이야기하고, 내면화된 의식을 디자인의 목적으로 삼아 표현하는 것, 즉 ‘정치적 디자인을 추구하는 것’을 서울대학교에서 한 학기를 보내며 느낀 점과 함께 다루어보려고 한다.


중립적인 디자인이라는 착각

헬베티카


1956년에 디자인된 헬베티카(Helvetica)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서체로, 산세리프 계열의 중립적인 성격의 디자인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 디자이너들이 모더니즘적인 헬베티카를 비판하기 시작하고 헬베티카가 자본주의 혹은 사회주의를 함의한다는 관점이 떠오르며 헬베티카의 견고한 중립성은 깨지고 말았다. 헬베티카 위주의 서체를 사용하는 스튜디오 익스페레멘탈젯셋은 2003년 <<에미그레>>와의 인터뷰에서 “세상에 중립적인 서체는 없으며 헬베티카의 객관성은 근거 없는 믿음이라는 사실을 우리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습니다.”라 밝혔다. 헬베티카의 사례를 통해 우리는 완벽히 중립적인 디자인은 없고 내재적 의미를 배제한 채 만들어진 디자인도 시간이 지나면 편향된 디자인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디자인은 사회 속에서 완성되며 사회에서 완전한 중립은 존재할 수 없다.


세계지도

국토지리정보원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지도는 메르카토르 지도일 것이다. 메르카토르 지도는 교과서에 수록되어 있으며 구글과 빙, 애플의 표준 지도이다. 메르카토르 도법에 익숙한 디자이너가 세계지도를 이용한 디자인을 한다면 이 지도를 사용할 가능성이 높겠지만, 메르카토르 지도는 식민주의적이며 열대 지역의 제3세계 국가들을 축소하는 도법이라 강하게 비판받아온 바 있다.

Wikimedia

골-페터스 지도는 메르카토르 지도의 대안으로 제시된다. 이 지도는 지역 간 면적의 상대적 비율을 사실과 같게 표현하며 메르카토르 지도의 단점을 보완해 UN의 표준 지도로 사용되고 있다. 왜곡이 생길 수밖에 없는 지도의 특성상 지역 간의 방향과 형태가 실제와 다르다는 한계가 있지만, 대표적인 공정한 도법으로 평가받는다.

Wikimedia

내셔널지오그래픽의 공식 지도로 선정된 빈켈 트리펠 지도는 거리, 방향, 면적의 왜곡을 최소화해 가장 정확한 지도로 꼽힌다. 하지만 ‘공정함’, ‘정확함’이 정치적 중립을 뜻하지는 않는다. 골-페터스 지도와 빈켈트리펠 지도 모두 탈식민주의적 가치를 내재하고 있고, 이 사례는 공정을 추구하는 행위조차 정치적 의미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서울대학교는 ‘정치적 디자인’을 추구하기에 좋은 곳인가

대학에서 디자인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각기 다른 목적을 갖고 있다. 누군가는 에코디자인을 추구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공동체나 개인을 중시한다. 디자인의 목적은 이데올로기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서울대학교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는 데 있어 최적의 환경을 제공한다. 학생들은 미술적 소양뿐만 아니라 학문적 식견을 함양하고, 그 과정에서 형성된 자신의 사상을 디자인 과정에서 가치판단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 어떤 디자인의 메시지는 계도적 또는 정치선전적 목표를 함축하고 있는데, 이는 디자이너의 내면화된 이데올로기의 체현이다. 견고하게 정립된 자신의 입장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담론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가 필요하며, 이를 위해 디자이너는 다양한 의견을 접해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수업에서 정치적 견해를 드러내는 것은 조심스럽다. 필자의 경험에 따르면, 한 수업에서 젠더와 퀴어에 관한 질문을 던지며 토론을 유도했지만, 학생들은 자신의 주장을 드러내기를 꺼렸다. 다른 수업에서는 여성, 아동, 장애인 권리 등에 대한 피상적인 견해를 표현하는 데는 우호적이었으나 논쟁이 잦은 내부적인 주제를 다룰 때는 침묵했다. 전공수업에서도 논란의 소지가 있다는 이유로 디자인을 통해 정치적 의사를 담는 것이 지양되었고, 어떤 학생의 정치적 견해는 모호하고 ‘적당한’ 주제로 축소되었다. 이러한 태도는 건설적인 논의를 방해하고, 디자인에 한계를 정함으로써 다양성과 발전 가능성을 저해한다. 디자인 속 메시지는 비판할 수 있지만, 디자인에 사상을 담는 행위 자체나 그러한 표현을 대학 차원에서 허용했다는 점을 비판할 수는 없다. 비록 정치적 디자인을 추구하는 디자이너가 아니라도, 디자인의 정치성에 대해 고민해 보는 것은 중요하다. 대학이 다양한 경험을 제공한다면 학생들은 정체성을 확립하는 과정을 통해 더욱 고차원적인 디자인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서울대학교 디자인 연합(SNUSDY) 인스타그램 | @snu_sdy.offic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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