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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작업물에 대한 공격은 나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한다

"아 짜쳐... 짜치는데?" 디자이너가 자괴감을 극복하는 방법 - 추상은

‘아 짜쳐…. 짜치는데? 조금 짜치는 것 같아. 근데 이게 좀 짜치지 않아? 나머지는 다 좋은데 여기가 너무 짜쳐.’


무언가를 만드는 과정은 고상함과는 거리가 멀다. 나는 비록 애송이지만, 내가 경험해 본 바 모든 창작은 짜치는 것들 중에서 덜 짜치는 것을 골라 그것을 가장 안 짜쳐보이게 포장하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또 나는 비록 애송이지만, 이것이 내가 애송이이기 때문에 드는 생각이 아님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내가 나이를 먹고, 경력을 쌓아서, 나름의 내놓을만한 작업물이 몇 개 생기게 될 쯤에도 이 인식은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직감. 나는 종종 맥북 앞에 앉아 무력하게 생각하곤 한다. 모차르트도 곡을 쓰다가 짜쳐서 그 파스타처럼 돌돌 말린 머리를 헝클어뜨린 적이 있을까. 혹은 완성은 했는데, 특정 구간이 너무 짜친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그보다 덜 짜친 버전을 만들어낼 자신이 없어서, 제발 다른 사람들이 그 짜침을 느끼지 못했으면 하고 기도하며-눈을 꼭 감고 피아노를 친 적이 있을까.


짜친다는 것은 무엇일까. 무엇이기에 우리를 이렇게나 힘들게 하는 것일까.


[짜치다]  

1. 수준이 모자라거나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

2. 성과물 등이 예쁘지 않거나 3류라고 생각되는 경우

3. 유치하다고 생각되는 경우


한 네이버 블로거는 잔인하리만치 신속정확하게 우리에게 답변을 제공한다. 두 번째 뜻에 밑줄 그으시면 되겠다.  


1. 성과물 등이(여기서 디자인을 하는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 예쁘지 않거나(짜침의 예시 1)

3. 3류라고 생각되는 경우(짜침의 예시 2).


국어사전에 등재되었다거나 하는 정의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인사이트를 가지고 만들어진 문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왜냐하면 무지하게 찔렸기 때문이다. 나의 짜침 데이터를 정확한 용어로 정리해 낸 듯했다. 예쁘지 않거나, 3류라고 생각되는 경우.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의 분석을 할 수 있다. 첫 번째, 창작물의 비주얼이 짜침에 미치는 영향. ‘예쁘지 않거나’라는 워딩이 주는 의미를 생각해 본 바이다. 두 번째, 창작물이 3류가 되면 창작자도 3류가 되는 것 같은 감각. 이건 아무래도 ‘류’라는 개념을 생각해 보니. 내 작업물이 구려서 속상하다기보다는 내 구린 작업물을 보면 나를 구린 사람으로 인식할까 봐, 그러니까 정확히는 내 작업물이 아니라 내가 3류로 보일까 봐 염려했던 그 마음을 꿰뚫은 것 같아서. 혹은 두 가지를 합쳐볼 수도 있다. 못생긴 3류 창작물을 만들어내면 창작자도 그렇게 되는 것 같은 착각. 나는 이것을 ‘창작물과 창작자 동일시’ 현상이라 칭하고자 한다.


디자이너는, 혹은 디자이너가 아니더라도 무언가를 창작해 내는 사람은, 그 과정에서 본인을 사용한다. 시간과 돈뿐만 아니라 그간 살아온 인생을 사용한다. 단순 경험을 일컫는 말은 아니다. 경험으로 퉁 치기엔 타고난 감각-소위 요즘 ‘미감’이라 불리는-이 담당하는 책임이 막중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창작의 과정에선 무수한 문제를 마주하기 마련이고, 이를 해결하는 메커니즘에 그 사람의 성질이 그대로 녹아들게 된다. 그동안 어떤 작업을 해오며 문제를 뜯어고치곤 했는지, 어제 밥을 먹은 식당의 간판 폰트가 무엇이었는지. 중학교 때 푹 빠져 읽곤 했던 만화책은 어떤 장르였는지. 처음 알파벳을 배울 때 영어 노트 줄에 맞춰 예쁘게 쓰는 아이였는지, 이 세상에 눈 떠 무얼 보며 자라왔는지. 이는 창작자의 능동적인 행동이 아니고, 다만 창작에 몰두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등장하기에 일종의 ‘현상’으로 분류된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이 ‘창작물과 창작자 동일시’ 현상의 근본적 원인이라 할 수 있겠다. 창작자는 무의식적으로 창작물에 본인의 너무나 많은 속성을 집어넣곤 한다. 마치 해리포터에 등장하는 호크룩스처럼. 그리고 만든 것 안에 과도한 양의 ‘나’가 함유되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데, 그 순간은 대부분 타인이 창작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평가를 내릴 때이다. 종종 타인이 작업물에 디테일한 호평을 표할 때 솟구치는 도파민으로 이 사실을 알아차리기도 하지만, 강하게 기억에 남는 순간은 역시나 ‘어딘가 짜친다’ 는 기색을 내비칠 때이다.


혹은 다수의 경우에서 짜친다는 평을 내리는 사람은 타인이 아니라 스스로이기도 하다. 이는 타인의 평보다 더 강력한 효과를 가질 때도 있어, 한 번 생각이 들면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 결국에는 창작자로 하여금 어떤 방식으로든 일을 치게 하곤 한다. 또 이때에도 ‘창작물과 창작자 동일시’ 현상은 똑같이 적용되기에, 스스로를 구리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정도에 따른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무언가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이를 피할 수 없는 노릇이다. ‘나’를 재료 삼아 갈아 넣어서 아웃풋을 내는 과정은 창작의 본질과 너무 맞닿아있기에 이것을 제외하고 창작 활동을 하겠다는 것은 모순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디자이너들은, 또 아티스트들은 손에 잡고 있던 것을 관두지 않는 한 짜친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호크룩스 깨진 볼드모트처럼 머리를 쥐어뜯을 수 없으므로, 이 ‘짜친다’ 에 대한 약간의 인식 변화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짜친다는 것도 그저 다음 문제 해결의 재료일 뿐이라고 여기는 편이 좋다는 것이다.


하나의 프로세스를 소개한다.


<The Creative Process>  

1. This is awesome

2. This is tricky

3. This sucks

4. I suck

5. This might be okay

6. This is awesome


총 6단계로 된 이 프로세스. 번역하자면 창작의 단계이다.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단순하다. 창작자들은 짜친다는 것을 (다소 우스울 수 있겠으나) 엄연한 창작의 단계로 인정하고, ‘나’의 일부로 받아들여 다음 창작의 사이클에 녹여내야 한다는 것. 본래 창작이란 지속적인 개선의 결과물임을 잊어선 안 된다.


결국, 창작에서 느껴지는 ‘창작물과 창작자 동일시’ 현상과 그로 인해 스스로를 짜친다고 생각하는 결과는 불가피하다 못해 필요한 스텝이다. 그러니 짜치는 것은 창작자의 전체가 아니라 창작자를 이루는 아주 무수한 요소 중 하나에 그치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다른 재료를 투입하는 시도가 분명히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보시라.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쥐고 태어났으며 많은 것을 보고 읽으며 자라왔기에, 요리하는 일은 크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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