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EMPATHIZE 가장 중요한 단계, 공감 - 체험 편
앞서 디자인 씽킹이란 무엇인지 육하원칙으로 정리하였다. 이번 편에서는 디자인 씽킹의 핵심이자 첫 단계인 공감하는 방법에 대해서 알아보려 한다. 디자인 씽킹의 공감은 니드파인딩 Needfinding 이라는, 고객의 필요를 발견하는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스탠포드에서 말하는 공감, 곧 니드파인딩의 정신을 가장 잘 보여주는 디자이너로는 1952년 미국에서 태어난 패트리샤 무어 Patricia Moore를 뽑을 수 있다. 대학을 졸업할 때 즈음, 패트리샤는 짙은 호기심어린 눈매와 발랄한 곱슬머리를 가진 포부 있는 여성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제품 디자인의 부푼 꿈을 안고 1970년 당대 최고의 디자이너라 불리던 레이먼드 로위의 디자인 에이전시에 당당히 합격하였다.
취업의 기쁨도 잠시, 그녀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바로 회사에 있던 300여명의 직원 중 단 한 사람, 본인만 여성이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당연하게도, 그 회사의 모든 제품들은 건강한 백인 남성들을 기준으로 디자인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 그녀는 용기 있는 질문을 하게 된다. ‘걸어다닐 두 발이 없는 사람은요? 손가락 관절염으로 고생하는 사람은요?’ 그런 그녀에게 돌아온 대답은 차가웠다. ‘패트리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위한 디자인은 하지 않아.’
패트리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위한 디자인은 하지 않아.
그 결과, 이 여성은 26살이 되던 해, 지금으로서도 대담한 사회적 실험을 거행했다. 바로 ‘진짜’ 할머니가 되어 일상을 살아 보는 것이었다. 당시 분장 코미디로 유명했던 SNL (Saturday Night Live)이라는 TV 프로그램의 메이크업 아티스트의 도움까지 받았다. 뿌연 안경알을 사용하여 시력을 줄이고, 보청기와 지팡이를 사용하는 그녀는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그리고 어쩌면 그녀 스스로 느끼기에도 영락없는 할머니였다. 이 노인 패트리샤 (‘Old Pat’)의 모습으로 그녀는 1970년대 몇 년에 걸쳐 미국의 100개가 넘는 도시를 여행하며 노인들이 일상에서 겪는 어려움을 몸소 체험해 보았다. 하루는 젊은 강도들을 만나 두드려 맞아 평생 남을 상처를 얻기도 했다.
이 훈장같은 상처를 얻으면서까지 그녀가 하려고 했던 것은 무엇일까? 바로 내가 공감하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깊은 몰입 (immersion)이자 체험이다. 그리고 그녀의 이런 시간들은 결코 무시되거나 사라지지 않았다. 1980년 그녀는 이 긴 여행에서 얻은 깨달음을 바탕으로 새로운 디자인 에이전시를 설립한다. 그녀의 디자인들은 모두를 위한 디자인 (universal design)의 효시가 되었다.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많은 디자인들은 그녀의 깊은 공감에서 시작되었다.
대표적인 예로, 아직도 미국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는 OXO사의 주방도구 시리즈가 있다. 1989년, 샘 파버 Sam Farber라는 기업인이 관절염으로 고생하는 아내를 위해 잡기 좋은 주방도구 라인을 디자인하기 원했다. 패트리샤의 깊은 공감을 바탕으로 한 컨설팅으로 OXO Good Grips (잘 잡히는) 시리즈가 탄생하게 되었다. 당시 감자 깎는 필러는 쇠로 만들어 미끄럽고 잡기 어려웠다. 패트리샤는 자전거 핸들에 영감을 받아 잘 미끄러지지 않으면서도 기능이 우수한 새로운 필러를 만들었고, 이 제품은 미국의 현대미술박물관 (MoMa - Museum of Modern Arts)에 영구 컬렉션으로 등재되었다.
(상: 기존의 감자 필러 - 중: 당시 디자인되었던 감자 필러 - 하: 현재 판매되는 OXO사의 필러)
패트리샤처럼 오랜 시간 동안 체험해보지 않더라도, 단 하루라도 나의 사용자의 인생을 그들의 눈높이에서 살아 보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인사이트를 제공한다.
스탠포드 기계과 석,박사 학생들 중 디자인에 중점을 맞추어 공부하고 싶다면 꼭 들어야 하는 수업이 있다. ME310 - Global Engineering Design Thinking, Innovation, and Entrepreneurship이라는 수업으로, 다양한 배경의 학생들이 팀을 이루어 각기 다른 기업의 후원을 받아 디자인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우리 팀의 경우에는 폭스바겐에서 후원을 받아, 무인 택시를 이용하는 휠체어 사용자들을 위한 디자인을 구상하는 것이 주제였다.
휠체어를 써본 적이 없는 우리 팀으로서는 완전히 새로운 공감이 필요한 영역이었고, 나는 스탠포드 학부 제품 디자인 전공의 명예를 실추시킬 수 없어 휠체어 사용을 해보겠다고 자원했다. 이전에 휠체어 프로젝트를 맡았던 한 선배는 휠체어 생활을 몇 주나 했다는데, 나는 고작 하루를 채우고는 나가떨어졌다. 운동이라곤 해 본 적 없는 팔로 휠체어 바퀴를 밀며 드넓은 스탠포드 캠퍼스를 통학하니 여간 힘든게 아니었다. 그래서 결코 깊은 공감을 해보았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이 짧은 시간 안에 휠체어로 학교 버스를 타고, 수많은 문들을 여닫으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에게 가장 크게 다가온 것은 확 달라진 시간 개념과 제한된 독립성이었다. 학교 버스를 타려니, 휠체어용 안전벨트가 설치된 공간으로 가서 바닥에서 올라오는 안전벨트로 휠체어를 고정해야 했다. 일단 운전사분께서 운전석에서 내려와서 한 번도 제대로 쓰인 적 없는 것 같은 벨트를 낑낑대며 꺼내셔야 했고, 그 뒤에도 안전벨트를 휠체어 어디에 고정을 해야 할 지 모르셔서 (물론 나도 몰랐다) 한참을 헤맸다. 그 시간이 너무나 길게 느껴지고, 다른 사람이 나에게 이런 많은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는 사실이 당황스러웠다. 이 프로젝트의 세부 내용은 이후에 케이스 스터디에서 다루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이처럼 단 하루, 한 시간, 혹은 십분이라도 나의 사용자의 생활을 살아보는 것이 전혀 하지 않는 것 보다는 낫다는 이야기로 마무리한다. 또한 나의 개인적인 체험엔 한계가 있으므로, 내가 느낀 부분이 진짜 사용자들도 동의하는 부분인지 확인하는 단계가 필요하겠다.
이상으로 공감의 가장 효과적인 방법인 체험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다음 편에서는 사용자를 관찰하는 방법에 대해서 소개하겠다.
1. 가장 확실한 니드파인딩 방법은 체험이다.
2. 패트리샤 무어의 '진짜' 할머니 체험은 우리에게 큰 귀감이 된다.
3. 단 하루라도 사용자의 일상을 살아보는 것은 살아보지 않은 것과 천지 차이이다.
*바쁜 일상에서 시간을 내어 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위 내용에 대해 궁금하신 점이나 새롭게 다가왔던 점이 있으시면 자유롭게 덧글을 달아주시고, 그러한 점이 없다면 본문을 잠깐만 시간을 들여 다시 훝어 보시길 권장합니다. 새롭게 접한 지식에 대하여 궁금한 점과 나의 관점을 정리하는 것은 스탠포드의 모든 학생이 수업에서 자연스럽게 익히는 학습방법입니다. 또 공유, 구독과 덧글을 통해 저는 힘을 얻고 더욱 양질의 글을 쓸 수 있습니다 :)
(패트리샤의 모교 Rochester Institute of Technology에서 진행한 인터뷰와 Wired 기사를 바탕으로 내용을 구성하였다. (https://www.rit.edu/simonecenter/innovation-hall-of-fame/patricia-moore)
https://www.wired.com/story/patricia-moore-sacrificed-youth-to-get-tech-bros-to-grow-up/)
이미지 출처:
Amazon - Linden Sweden Original Jonas Vegetable Peelers for Kitchen
Museum of Modern Arts https://www.moma.org/collection/works/3758
https://sites.google.com/stanford.edu/global-engineering-design-inno/projects?authuser=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