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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하지 않게 얻은 여유

by 김세은


예기치 못한 불청객이 내 계획을 완전히 초토화 해버렸다.

곧 추석 명절이 다가온다. 문득 지난해 추석의 풍경이 떠올랐다.


명절지나 촘촘히 짜인 스케줄이 잡혀 있었다.


추석 전날 온 가족이 모여 시끌벅적한 분위기속에 온갖 전을 부치고 명절 음식을 마련했다.

동그랑땡전, 동태전, 호박전, 버섯전 등 형형색색의 음식들이 차려졌다.

선물 포장되어 온 보리굴비도 준비하자며 우겨서 부지런히 만들었다.

쌀 뜬 물에 담갔다가 쪄서 기름에 노릇노릇 구운 뒤 정성스레 발라 접시에 담았다. 고기보다 생선을 좋아하는 내 입맛 덕분에 다소 번거로운 음식이 상에 올랐다.


얼음을 띄운 녹차물에 밥을 말아 어머니 수저 위에 올려드리며 웃음소리 요란하고 따뜻한 명절을 만끽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밤이 깊자 목이 잠기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떠들어서 그렇겠지’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다음 날 아침 목소리는 거칠게 변했고, 곧이어 목을 찢는 듯한 기침이 몰아쳤다. 한 번 시작되면 배 속이 다 뒤집히고서야 멈추는 기침은 하루 종일 나를 괴롭혔다. 병원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며칠간의 약속들은 줄줄이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몇 달 만에 잡은 동창 모임, 늘 기다려지던 글쓰기 수업과 추억의 팝송 시간, 그리고 토요일에 예정된 조카의 결혼식까지——연이은 일정들이 한 순간 내 손을 떠나버렸다.


폭우처럼 쏟아지는 가을비가 창문을 두드리던 날, 마음은 또 얼마나 스산한지…

젊은 날에는 건강에 자신만만 했었는데 이제 겨우 일흔을 막 넘겼을 뿐인데..

“혹시 큰 병은 아닐까” 기침 속에 피가 섞여 나올 때는 덜컥 겁이 났다. 소중한 무엇을 잃어버린 듯 자신감이 흔들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에 잠식되었다.


그때 문득, 황창연 신부님의 특유의 말투가 떠올랐다.

“죽기 전엔 절대 안 죽어.”

실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웃음은 역시 약이었다. “더 이상 처지지 말고, 기운 내보자” 스스로를 다독였다.


커피 포트에 물을 붓고 한 모금 마시며 창 밖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기침은 독하게 이어졌지만, 마음은 조금씩 단단해졌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생경하게 들렸지만 모처럼의 넉넉한 시간이 의외로 편안함을 주었다. 기침으로 얼룩진 시간이었지만 나쁘지 않음을 깨달았다.

무너진 일정이 오히려 내 삶을 차분히 돌아보는 기회도 되어 주었다.


머릿속에 남은 아픈 기억, 발 구르며 웃던 순간들, 쏜살같이 흘러간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그렇게 나는 뜻하지 않게 얻은 며칠간의 여유 속에서 나 자신을 다시 만났다.


그 동안 쉼 없이 달려온 날들, 바쁘게 흘러간 일상 속에 불현듯 찾아온 손님은 내 마음을 살피는 소중한 시간이 되어 주었다.


가끔은, 이렇게 잠시 쉬어가도 괜찮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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