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오늘.
오랜만에 여고 동창 네 명이 13일, 예술의전당으로 향했다.
예술의전당에서는 매년 ‘마티네 콘서트’라 불리는 낮 공연 시리즈가 열린다. 마티네는 프랑스어 ‘마탱(matin)’에서 온 말로 ‘아침’이라는 뜻이다.
올 가을에는 13일 ‘한화생명과 함께하는 11시 콘서트’를 시작으로, 16일 ‘마음 클래식’, 22일 ‘토요 콘서트’까지 총 세 편의 공연이 이어진다.
우리가 찾은 ‘11시 콘서트’는 가을 감성을 자극하는 작품들로 채워졌다.
부산시향 부지휘자 백승현이 코리아쿱오케스트라를 이끌고, 바이올리니스트 이석중과 클라리네티스트 채재일이 협연했다. 배우 강석우는 해설자로 무대에 섰다.
공연 프로그램은 베토벤의 로망스 제2번 F장조, 베버의 클라리넷 협주곡 제2번, 생상스의 서주와 론도 카프리치오소, 그리고 하차투리안의 스파르타쿠스 모음곡 제2번이었다.
음악과 함께 떠오른 옛 시간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음악에 위로받고, 기쁘게 뛰기도, 때로는 조용히 젖어들기도 한다.
싱어게인, 미스터트롯, 팬텀싱어, 불후의 명곡…수많은 음악 프로그램에 귀를 기울이고, 7080 팝송을 들으며 엽서로 신청곡을 보내곤 했던 스무 살의 기억도 문득 떠올랐다.
부끄럽지만 클래식은 여전히 귀에 익은 곡 몇 개 정도만 아는 수준이다.
그래서 공연 전에는 유튜브에서 연주를 찾아놓고 글 쓰며, 책 읽으며, 요리하며, 밥 먹으며… 잠들기 직전까지도 익숙해지려고 열심히 들었다.
돌아보니 70년을 살며 제대로 본 공연이라곤 연극 두 편, 뮤지컬 한 편, 그리고 호두까기 인형 발레 등 손에 꼽을 정도다. 너무 일만 하며 살아온 건 아닌가, 문득 그런 생각도 밀려왔다.
몇 해 전, 친정엄마와 올케와 함께 찾았던 예술의전당.
해마다 10월이면 찾던 아트페어도, 코로나로 이혜자 화가님을 떠나 보낸 후로는 한가람미술관을 다시 찾지 못했었다.
그런 나에게 오늘의 예술의전당은 더욱 특별했다.
설렘과 함께 도착한 공연장
클래식 콘서트에 가는 날이라 옷차림에도 괜히 신경이 쓰였다.
평소엔 배낭 하나 메고 운동화, 청바지 차림으로 돌아다니지만, 오늘만큼은 고민도 많았다. 며칠 전부터 뭘 입을까, 무얼 신을까 부산했지만 나름 ‘단정하면서 편안한 차림’으로 간다.
남부터미널 5번 출구에서 네 명이 만나 예술의전당으로 걸었다.
10시에는 브런치 타임이 있어 지하 1층에서 빵과 과일, 커피와 주스를 받아 들고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30분 전, 지정된 좌석에 앉아 기대와 설렘으로 마음이 가득 찼다.
1부 - 첫 곡은 베토벤의 로망스 제2번.
감미로운 선율과 목가적인 정취가 물결처럼 스며들었다. 섬세한 선율 속에도 특유의 박력과 품위있게 돋보이는 음악, 역시 베토벤이네요
이어진 베버의 클라리넷 협주곡 제2번.
맑고 청량한 클라리넷 소리에 마음이 절로 흔들렸다. 통통 튀는 리듬, 유연한 박자, 익숙한 멜로디가 어우러져 활기 넘치는 장면을 연상케 했다. 마치 낭만의 강물 위를 조용히 떠다니는 듯한 여유로운 풍경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휴식 시간.
현실로 돌아온 듯하지만 마음속의 여운은 계속 남았다
2부- 생상스의 서주와 론도 카프리치오소.
그가 경애하던 바이올리니스트 사라사테에게 바치는 헌사라는 말을 떠올리며 들으니 더 실감이 났다.
감미로움과 기교, 남국의 정열과 우수가 어우러져 파도치는 바다처럼 나를 휘감았다.
하차투리안의 스파르타쿠스 모음곡 제2번은 그야말로 장대한 드라마였다.
노예 해방과 평등을 향해 싸웠던 스파르타쿠스의 이야기가 음률 속에서 살아 움직였다.
기쁨과 앞날에 대한 불안감이 교차하는 시대상을 유려하면서도 애틋한 음률 속에 담아내듯 강렬함과 심장이 두근거리기도 하고 섬세한 그림을 그리듯 잔잔함을 드러내기도 한다.
특히 인상깊었던 클라리넷연주자의 절절한 몸짓에서는 인간의 희로애락과 고뇌, 고독, 절규하는 몸짓들이 소리가 되어 뿜어 나옴을 느끼게 했다.
오늘 해설자로 나선 클래식 애호가로도 유명한 강석우님은 위트 넘치고 자연스러웠다. “웃자고 하는 이야기죠!…” 하며 스스로 멋짐을 자랑삼아 멘트 치는 멋진 중년의 모습에, 박수치며 환호로 답하며 공연장을 따뜻하게 채웠다.
공연장을 나서자 가을은 이미 절정에 올라 있었다.
붉게 물든 단풍 아래, 물감을 풀어놓은 듯 새파란 하늘.
젊은 아이들처럼 마구마구 인증샷을 찍으며, 무한한 감동으로 오랜만에 자유를 만끽했다.
집으로 돌아와 잠들기 전 천장을 바라보니, 그곳은 다시 무대가 되었다.
지휘자의 손끝, 연주자들의 몸짓, 악기들의 숨결이 또다시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벅참과 희열을 다시 느끼며 잠은 이미 저 멀리 밀어 내고 있었다.
곱게 물든 가을 정취 속에서 즐긴 11시 콘서트.
사랑하는 찐 친구들과 함께한 오늘은 오래도록 기억될 행복한 하루다.
가끔은 이렇게 음악과 가을, 한껏 취해도 괜찮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