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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망머리 앤 Mar 19. 2024

파이어위드

                                                                 

앨버타 북쪽의 겨울은 유난히 춥고도 길다. 

딱 잘라서 일 년의 반이 겨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우리 가족이 처음 앨버타 북쪽 스몰 타운으로 이사를 온 건 겨울 중에서도 가장 춥다는 1월이었다. 

사방을 둘러봐도 보이는 건 하얀 눈뿐이었다. 


꽁꽁 언 이 땅에도 과연 봄이 오긴 오는 걸까? 그런 불안감이 엄습해 올 때마다 난 이삿짐을 쌀 때 거듭 확인하며 챙겨 온 분홍꽃 꽃씨를 펴보곤 했다.


한국을 떠나 우리 가족이 이민자가 되어 밴쿠버에 첫발을 내디딘 건 2000년이었다. 


땅을 바꾸면 몸살을 앓는 게 어디 나무뿐일까? 


처음엔 살 집을 얻는 것조차 어려웠으니, 분명 우리에게도 힘겨운 시작이었다. 

이민자라서 신용이 바닥이었던 우리는 한참 만에야 정원이 풀로 가득한 허름한 월셋집을 겨우 얻어낼 수 있었다. 


빌린 집을 깨끗하게 관리해야 한다는 이곳의 렌트 문화에 바짝 긴장했던 난 짐을 풀기도 전에 한국 마트에서 호미부터 사 와 정원의 풀을 뽑기 시작했다. 


그렇게 풀과의 전쟁을 계속하던 어느 날, 내 시야에 눈에 아주 거슬리는 또 하나의 풀이 들어왔다. 

부엌 창문을 통해 보이는 그 풀은 차고 옥상 위 버려진 화분 속에서 슬며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분명 한국에서 봤던 풀과 아주 흡사했다. 


당장 뽑아버릴까도 싶었지만, 생명을 잉태하지 못한 채 그 좁은 화분 속에 갇힌 흙의 설움도 크겠다 싶었다. 그래서 꽃모종을 사다가 심어줄 때까지만 그냥 두자며 돌아섰다. 


그렇게 미뤄진 일은 결국 그 풀을 한참이나 자라게 만들었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불쑥 자란 풀이 분홍색을 첨가하며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냥 풀인 줄로만 알았는데 초록잎 사이사이로 분홍꽃이 방울방울 달려 있었다. 

분홍빛으로 치장한 이 깜찍한 꽃망울에 내가 애정을 품기 시작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동안 내 호미에 가슴 졸였을 꽃에 대한 미안함도 미안함이거니와, 그 꽃에게서 느끼는 어떤 동질감 때문이기도 했다. 


그 꽃의 씨앗이 자신의 존재마저 확인시킬 수 없는 낯선 땅으로 날아와 꽃을 피우기까지의 이야기가 먼 훗날 나의 스토리가 되길 바라서였던 것 같다.


‘나’라는 씨앗이 이 낯선 땅에 내려앉았는데 과연 풀일지 꽃일지, 끝내 내 존재를 확인시키지도 못한 채 밟히거나 뽑혀버리진 않을까? 그런 두려운 마음이 자꾸만 내 속에서 일어나 날 괴롭히곤 했었다.


그 무엇도 내 존재를 일깨워주지 않는 세상, 지레 겁에 질린 난 스스로 만든 투명한 방어막으로 우리 집 주위를 덮은 채 그 안에서만 숨어 살았다. 


영어로 말 걸어오는 세상이 무서워서 숨었고, 내 속사정에 무심하기만 한 세상이 섭섭해서 숨었다. 


그런데 그런 내게 분홍꽃이 찾아온 거였다. 


넉넉한 자연의 품에서 무리 지어 필 곳도 많으련만, 하필 버려진 화분 속 그 옹색한 땅에 혼자 내려앉아 내 눈앞에서 분홍꽃이 피어난 거였다. 


난 아침마다 내가 마실 커피 한잔과 꽃에게 줄 물 한 잔을 들고 분홍꽃을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게 분홍꽃은 빨래를 널다가도, 또 내가 내쉬는 숨이 방 안의 공기를 너무 무겁게 한다고 느낄 때도, 언제나 부엌문만 열면 찾아갈 수 있는 그런 친구가 되어줬다. 


찾아간 내가 의기소침해져 있을 때마다 분홍꽃은 내게 말했다. 


“비록 지금은 네가 쓸모없는 풀처럼 보일지라도 네 속엔 거친 땅도, 바람도 이길 강인함이 있다. 그걸 믿고 견뎌라. 그러면 언젠간 너도 꽃을 피울 거다.” 


그렇게 분홍꽃이 해주는 격려로 하루하루를 버티던 난 갑자기 그 꽃이 시들까 걱정이 앞서기 시작했다. 


피었으면 시드는 게 당연한데도, 그땐 어린아이처럼 자연 앞에 드러누워 떼를 한번 쓰고 싶었다. 


그래선지 분홍꽃 첫 송이가 바닥에 떨어진 날, 난 굳이 그 원인이 옹색한 땅 때문이라 우기며 그 꽃을 정원으로 옮겨 심는 수선을 피웠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서툰 운전 솜씨가 후진하다가 그만 정원으로 잘못 들어가는 바람에 분홍꽃 줄기를 부러뜨리고 말았다. 


분홍꽃 친구가 그만 내 차에 치여버린 것이었다.


급한 마음에 응급 상자를 들고나왔지만 약을 발라줄 수도, 꿰매줄 수도 없었다. 


간호사 경력을 다 살려봐도 버팀목을 대고 반창고로 감아주는 것밖엔 별도리가 없었다. 


하얀 반창고를 감은 꽃대에서 하루가 다르게 물기가 빠져나가는 걸 지켜보면서, 난 나의 경박함과 분홍꽃을 붙잡으려던 나의 집착을 자책하고 또 자책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을 흠뻑 주고 그 앞에 앉아있자면, 꽃망울에서 방울방울 떨어지는 게 물방울이 아닌 눈물만 같아 함께 울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비쩍 말라버린 줄기가 마지막 힘을 다해 내게 남긴 걸 발견했다. 


그건 분명 씨앗이었다.


분홍꽃 친구가 내게 꽃씨를 내밀며 화두를 던지고 있었다.

앞으로 이 땅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물으며, 내게 더 강해지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물 한 모금 빨아올릴 수 없는 꺾어진 몸뚱이로도 끝내 꽃씨를 남겨 생명을 지켜내는 분홍꽃을 보면서, 난 그만 숙연해지고 말았다. 


난 그때까지도 그 분홍꽃의 진짜 이름을 몰랐다. 


하지만 그때부터 그 분홍꽃은 단순한 꽃을 넘어 내 인생 또 하나의 멘토가 되었다. 


난 이사할 때마다 그 꽃씨를 챙겨와 정원에 뿌렸고, 그렇게 분홍꽃은 나의 친구로 상당 기간을 나와 함께 살아줬다.


밴쿠버 생활 3년 만에 남편이 앨버타 북쪽으로 이사를 갈 거라고 했을 때는 정말 땅이 꺼지는 것만 같았다. 


이제 겨우 살만하다 싶은데 다시 낯선 땅으로 가야 한다니, 멋모르고 한국에서 밴쿠버로 올 때는 차라리 두렵지 않았었다. 


하지만 땅 바꿔 살기가 얼마나 힘든지 한번 호되게 몸살을 치른 끝이라서 그런지, 그땐 두려움이 먼저 내 앞을 막아섰다. 


하지만 그래도 가야 한다니, 분홍꽃 꽃씨를 이삿짐에 챙겨 넣으며 난 스스로에게 말했다. 


"내 땅인 한국도 뒤로 하고 캐나다로 왔는데, 하물며 캐나다에서 캐나다 못 갈 곳이 어디 있겠냐? 그래. 가보자! 분홍꽃 너랑 같이 가서 또 살아보자!" 


그렇게 짐을 싸 이곳으로 이사를 와 첫 겨울을 보내고 막상 봄이 되었지만, 난 정원 있는 집을 구하지 못해서 그냥 꽃씨를 서랍 안에 묵혀두고만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차로 시골길을 달려가는데, 길섶에 분홍꽃 무리가 보였다. 


분명 나의 분홍꽃과 똑같이 생긴 꽃이었다! 


홀쭉한 꽃대가 한자는 되는 키로 길게 자라서 바람에 한들거리는 분홍꽃들이 군락을 이루어 길가에 피어 있었다.

급하게 같이 간 친구에게 그 꽃의 이름을 물으니, ‘fireweed'라고 했다. 


'불풀이라고?' 눈여겨 자세히 보니 파이어위드는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하늘과 땅이 맞닿는 곳까지 정말 제 이름답게 불처럼 번져가는 꽃 무리가 실로 장관이었다. 


이렇게 당찬 꽃을 그동안 정원 한 귀퉁이에 가둬두고 있었으니, 난 미안함과 감동으로 눈가가 뜨거워지고 말았다.

그날 집에 돌아오자마자 난 서랍에 넣어둔 꽃씨를 당장 꺼내 들고 서둘러 언덕으로 달려 나갔다. 


넌 작은 정원에 갇힐 꽃이 아니다. 

그러니 이제 자연으로 돌아가 불처럼 번져나가라! 


이제부턴 나도 내 정원에 대한 집착을 버리련다. 

한국이란 익숙한 정원도 이미 떠나왔고, 밴쿠버란 익숙한 정원도 이젠 잊겠다! 


나도 너처럼 그 어디에서라도 강하게 뿌리내리며 꽃을 피우겠다. 


그게 바로 네가 오늘 내게 하고 싶었던 말이 아니냐? 

그걸 말하고 싶어 네가 먼저 와 이곳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던 거 아니냐?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의 삶을 그대로 모방해 살아갈 수만 있어도 훌륭한 삶이 된다고 했다. 


앞으로 캐나다에서 나의 삶은 바로 파이어위드, 바로 널 모방한 삶이 될 거다! 


하얀 날개를 단 분홍꽃 꽃씨가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하늘 높이 날아오르던 날, 

나도 그 언덕에서 하나의 꽃씨가 되어 함께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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