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소울푸드, 미국 캠핑 체험, 캠핑 요리의 진수
그랜비 호수
Lake Granby
처음 그랜비 호수에 발을 내디뎠다. 떠나는 일, 이 일이
이제는 점차 익숙해지고 있었다. 자연 속에서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는 기분은 여전히 설레었고, 배낭에 짐을 챙겨 넣는 일 또한 그러했다. 덴버에서 차로 2시간 거리에 위치한 그랜비 호수를 향해 달려갈 때, 그때를 기억한다. 콜로라도 주 자체가 광대했기에 호수 또한 그러했다. 콜로라도 주에서 세 번째로 큰 이 호수는, 해발 8,280피트에 자리한 거대한 수면이 매년 수많은 관광객을 맞이하는 명소였다. 보트 타기, 낚시, 하이킹 등 다양한 활동이 가능한 곳이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우리를 맞이한 풍경은 구름과 안개로 가득 찬 흐릿한 호수였지만, 나의 눈과 마음은 그저 맑음이었다. 맑은 날을 기대하지도 않았고, 흐린 날을 원한 것도 아니었기에, 그 불확실한 날씨마저도 자연 속에 풍덩 빠지는 기쁨이 있었다. 안개에 덮인 나무들, 그리고 산, 그 속에 감춰진 형상들이 보일 듯 말 듯. 그러한 정적인 풍경 속에서 나는 그랜비 호수에게 손을 내밀어보았다. 그토록 평온한 물결에, 흐릿한 회색빛까지. 그 자체로 완벽했다.
아라파호 밸리 목장 Arapaho Valley Ranch는 그랜비 호수 (Lake Granby) 근처에 위치하고 있으며, 보트 타기, 낚시, 하이킹 등 다양한 활동과 함께 캠핑장을 제공하고 있다. 한 마리의 말 덕분에 한층 더 쓸쓸하게 느껴지는 듯했으나 이 순간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This is the moment.
아라파호 베이 캠프장
Arapaho Bay Roaring Fork Campgound
그랜드 레이크에서 남동쪽,
그랜비 호수의 아라파호 국립 휴양지에 위치한
아라파호 베이 캠프장
무거워 보이는 구름 덕에 맑고 푸른 호수가 아니라 회색빛의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주변은 마비된 것처럼 정적이 흘렀고, 보트 타기와 낚시가 한참 진행 중이었다.
이 순간을 <평온한 물결>이라고 표현해 보고 싶다. 고즈넉한 호수의 매력에 빠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신선하고 부드러운 봄의 물결, 얼어붙은 겨울의 물결, 적막 속의 가을 물결, 뜨거운 태양빛이 늘 반사되어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여름의 물결이었다.
산송풍뎅이의 위험으로 나무에 피해가 가면서 캠핑장 내의 나무 대부분이 제거되었다. 그 결과 쉴만한 그늘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각자 뜨거운 태양을 가릴 수 있는 도구를 준비해야 한다.
우리는 텐트를 설치하고 모닥불을 피우기 시작했다. 건조한 고산지대의 바람 덕에 불은 금세 타올랐다. 활활. 작은 나뭇가지와 풀잎, 흙을 모아 불씨를 살리고, 점차 큰 나뭇가지를 더해 불길을 키워갔다. 그 불길은 단순한 불이 아니었다. 내가 늘 그리는 기쁨의 축제였다. 기쁜 날의 축제. 기쁨의 환호성. 음악이 빠질 수 없었다. 삶의 축제 같은 현장에는 늘 음악이 함께 했다. 그 영롱한 소리는 모닥불의 열기와 함께 잘 어우러졌다. 사실 우리 넷의 관계는 쏘울 메이트까지는 아닌 그런 관계였다. 사람과 사람의 미묘한 거리와 감정들을 뒤로하더라도 이 아름다운 풍경을 소유할 수 있다는 사실이 더 기억에 남았으니, 오히려 나에겐 선물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삼겹살, 고구마, 김치, 옥수수, 쌀 등을 준비해 갔다. 호일을 깔아주고 아이스박스에 담겨있던 삼겹살과 소시지를 꺼내어 지글지글 구워주었다. 삼겹살을 굽는 냄새와 흙먼지, 재잘거리는 소리들로 충만했던 공간이었다. 기름 튀는 소리와 고소한 냄새가 기억난다. 다른 캠핑족들은 강 부근에 자리를 잡았지만, 우리는 약간 높은 지대, 독립적인 공간에 머물렀기 때문에 편안했다.
고구마와 옥수수를 불 위에 올려 축제를 이어가는데, 새까맣게 타버린 옥수수 몇 알이 보였다. 쓰디쓴 옥수수와 달콤한 고구마를 한 입씩 베어 물며 별이 총총한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었다. 하늘의 별, 타는 불빛, 바람이 간지럽히는 모든 순간. 이토록 흥미진진한 순간.
우리가 머물던 공간이 어둠에 서서히 물들기 시작하였다. 땅에 불꽃이 점점 사그라지면서 우리는 텐트 안으로 들어갔고, 수십만 가지의 대화들이 솟아 나왔다. 그리고 좁은 텐트 안에서 꼼짝없이 누워 잠에 들었다. 5월의 밤은 매우 차가웠다. 마스크나 두꺼운 겨울옷이 꽤 큰 도움이 되었다.
아침
아침이 오는 소리가 반가웠다. 유희하는 열 개의 손가락으로 잠들어 있던 꿈도 깨워보고, 브이도 해보고, 따뜻하게 감싸도 보고, 하품하려 입을 가리기도 해 보고, 아침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캠핑에 빠뜨릴 수 없는 신라면이다. 그리고 누릉지까지.
바로 이거지.
한인마트에서 신라면 구입은 필수.
부대찌개? 김치찌개? 차가운 공기 속에서 찌개와 라면사리, 따뜻한 누룽지는 정말이지 특별했다. 미국 캠핑장에서 샐러드와 샌드위치가 아닌, 매콤하고 뜨거운 아침으로 시작을 한 것은 잘한 일이었다.
그리고 어느덧 떠날 시간이 다가왔다. 마지막으로 주변을 정리하고 둘러보며 발자국을 남겼다.
사랑하는 우리 아가에게,
엄마가 느낀 그 평온함과 싶은 사랑이, 지금 뱃속에서 꿈나라에 있을 너에게도 온전히 전해지고 있을까?
엄마는 매일 그런 생각을 해보곤 해.
너에게 내가 느낀 자연의 아름다움과 따뜻함이 고스란히 닿기를 바라는 마음이야.
네가 태어난다면, 우리 가족이 함께 그 호수를 다시 찾아가 보고 싶어. 그때는 너를 품에 안고, 옥수수와 고구마를 모닥불에 태워보며, 신라면의 맛을 보며, 바싹 구워진 삼겹살과 김치를 먹으며 또 다른 소중한 추억을 만들고 싶어.
엄마와 아빠는 너와 함께 자연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며, 세상의 멋진 순간들을 기억하고 기록으로 남기며 살아가고 싶단다. 그 모든 순간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우리가 함께 나누는 삶의 조각들이 얼마나 귀한지, 너도 알게 되길 바라면서 말이야.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따뜻한 모닥불이 피어오르는 것처럼,
흐릿한 안갯속에서도 고요한 수채화 같은 풍경이 존재하는 것처럼,
때로는 시커멓게 타버린 옥수수 속에서도 숨겨진 기막힌 맛을 찾아낼 수 있는 것처럼 말이야.
그러니 아가야,
너도 이 세상을 살면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너만의 맑고 티 없는, 따뜻한 삶의 방식을 창조해 나가기를 바래.
세상이 주는 모든 것, 그 안에 숨겨진 작은 아름다움을 소유하며, 소중히 여기며, 소박하지만 기쁜 날의 축제를 이어가며 말이야.
하나님께서 주신 세상을 너와 함께 모두 다 보고 싶구나. 백만 번의 여행의 꿈을 키워보자.
2024.0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