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쇼맨 - 어느 독재자의 네 번째 대역배우>
주체란 무엇일까?
과연 나는 지금 나로서 살고 있는가?
<쇼맨 - 어느 독재자의 네 번째 대역배우>는 가상의 국가 파라디수스에서 한 독재자의 대역배우로 살았던 한 노인 ‘네불라’의 고백을 중심으로, 사회 속 개인의 주체성과 대리성, 죄의식과 자기혐오, 자아의 통합을 비롯한 수많은 주제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미국 뉴저지의 한 소도시에서 마트 직원으로 살아가는 한국계 입양아 출신 수아는 유원지에서 한 노인 네불라를 만나고, 수아를 사진작가로 오해한 네불라는 그녀에게 촬영을 의뢰한다. 쉽게 돈을 벌 생각에 큰 고민 없이 제안을 수락한 수아는 본격적으로 촬영이 시작되면서 네불라의 지난 인생의 여정에 대해 듣게 된다.
네불라는 대리자로 살아온 인물이다. 대리자로 사는 것에 너무도 익숙해진 인물이다.
어린시절 많은 형제들 사이에서 부모에게 그다지 주목과 애정을 받지 못했던 그는 가족 구성원, 나아가 유명 연예인을 흉내 내며 관심을 받기 시작한다. 주목, 관심, 인정. 무엇인지 명확히 형용하기는 어렵지만 그것에 갈망을 느꼈던 네불라는 마을 사람들의 권유에 따라 배우가 되기 위해 연기에 도전하며 20대를 보낸다.
그러나 줄곧 자신만의 오리지널리티가 담긴 ‘연기’가 아닌 ‘흉내’를 내는 것에 그치기만 했던 그는 우연한 기회로 한 독재자의 대역배우가 된다. 본인을 지우고, 본인의 생각과 판단을 지우고, ‘네불라’가 아닌 자신이 흉내내는 독재자 ‘미토스’에게 보내는 환호를 자신의 것인 양 즐기며 대역배우의 삶을 살던 네불라는 혁명 이후 현실을 직면한 뒤 큰 충격에 빠진다.
‘살인귀’라 불린 독재자. 세뇌를 당해 미토스의 독재 행위가 모두 정당하고 다른 이들이 무언가 ‘오해’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네불라는 자신이 실제로 많은 사람들의 죽음과 고통에 일조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절망한다.
“나, 열심히 살았어요.” - 네불라
네불라의 말처럼, 그는 맡은 바에 충실했다. 성실히 흉내내고, 성실한 ‘대역배우’로 살았다. 그러나 스스로의 신념에 근거한 판단이나 성찰이 결여된 그의 이러한 맹목적인 성실함은 결국 파멸을 맞고 만다. 주체성을 잃어버린 공허한 삶의 비극적인 결말이다.
혁명 이후 복역을 마치고 미국으로 건너 온 네불라는 세탁소에서 일을 하며 살던 중 우연한 기회로 스탠드업 코미디 쇼를 시작하게 된다.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우스꽝스럽게 죽는 모습을 표현하는 ‘바보 쇼’에서 네불라는 끊임없이 죽으며 자신 안의 ‘미토스’를 죽여갔다. 독재자의 대역배우로서 그의 만행에 일조했다는 죄책감을 잘라내고자, 대역배우로 살았던 시절 행복감을 느꼈다는 자기혐오를 끊어내고자 그는 몇 밤 동안이나 열심히 죽고, 또 죽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인이 되어 수아 앞에 서 있는 네불라는 여전히 자신을 온전히 용서하지 못했다.
솔직한 회고와 고백이 끝난 후, 네불라는 수아에게 자신의 삶을 평가해달라고 부탁한다. 도저히 스스로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모르겠어서. 밉기도, 혐오스럽기도 하지만 안쓰럽고 사랑하고 싶은 ‘자신’이라서, 수아에게 이런 부탁을 하는 네불라의 말은 사실 ‘제발 비난하지 말고 자신의 삶을 이해해달라’는 이야기로 들린다.
네불라의 부탁에 혼란스러워하며 도망쳐 나온 수아는 공석이 된 마트 매니저를 뽑는 면접을 계기로 자신도 네불라와 다를 바 없는 ‘대리자’로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녀 역시 장애가 있는 동생을 돌보는 역할로 입양되었던 과거와 직장에서 좋은 자리를 얻고자 하는 현실에 얽매여 주체적으로 살지 못했던 것이다.
다시 네불라를 찾아간 수아는 네불라에게 그의 삶은 자신이 판단할 수 없다고 말해준다. 대신, 자신이 프레임 안에 담아낸 네불라의 삶의 궤적을 다시금 되짚어 들려준다. 혼란과 고뇌로 가득했던 네불라의 삶은 수아의 시선과 말을 통해 스스로의 인생을 돌아본 네불라만이 직접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네불라의 이야기 끝에는 수아의 이야기가 겹쳐진다. 세대도, 살아온 장소도 가치관도 다른 두 사람이지만, 주체가 아닌 대리자로서 살았던 경험을 공유하는 그들은 서로에게서 스스로를 발견한다.
네불라가 수아와의 마지막 만남 이후 스스로를 용서했는지, 진정 주체성을 회복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아마도, 과거의 기억에서만 자신을 찾는 일은 그만두고, 스스로의 의미를 다시금 찾기 위해 노력하며 조금은 앞으로 나아갔을 것이다. 수아 또한 네불라를 통해 자신의 면면을 돌아보고, 몇 년 간 떠나 있던 동생에게 편지를 쓰며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었다.
인생은 내 키만큼 깊은 바다
파도는 계속 쉼 없이 밀려 오는데
나는 헤엄칠 줄을 몰라
제자리에 서서 뛰어오른다
- 인생은 내 키만큼, <쇼맨 - 어느 독재자의 네 번째 대역배우>
막이 오르고 관객에게 닿는 첫 번째 메시지이다.
헤엄칠 줄 모르는 ‘나’는 내 키만큼 깊은 바다에 잠겨 쉴 새 없이 밀려오는 파도를 맞는다. 있는 힘껏 뛰어올라 턱끝까지 차오른 숨을 뱉어낼 때도, 가끔은 지쳐 수면 밑에서 숨을 참을 때도 있지만, 절대 뛰어오르기를 멈출 수는 없다. 아무리 파도가 밀려온들, 아무리 숨이 차고 몸이 아픈들, ‘나’는 계속해서 뛰어올라야만 한다. 잠겨 죽을 수는 없으니 말이다.
극의 시작에서, 무대에 혼자 등장한 네불라는 이 가사를 되뇌이며 인생이라는 바다 속을 계속해서 뛰어오른다. 금방 다시 가라앉아도, 또 다시 뛰어오르기를 반복한다. 그러나 극 말미 ‘인생은 내 키만큼 Rep.’에서는 대리자로서 살아온 자신의 삶을 직면한 수아, 그리고 나아가 극에 등장하는 모든 배우가 함께 뛰어오른다.
결국 네불라나 수아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내 키만큼 깊은 바다에 잠겨 파도를 맞으며 뛰어오르고 가라앉기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렇게 끊임없이 밀려오는 삶 속에서, 제자리걸음 같더라도 계속해서 이어가야 한다는 점은, 인간 삶의 본질적인 고통이자 숙명과도 같을 것이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냉소하거나 포기해 가라앉지 않고, 자신을 잃어버려 텅 빈 채로 표류하지 않고, 계속해서 뛰어오른다는 것이다. ‘인생은 내 키만큼 Rep.’에서 수아는 비로소 스스로의 의지로 뛰어오르기 시작한다. 그렇게 수아는 한 단계 성장했다.
어찌 되었건 우리는 계속해서 각자 자신의 키만큼 깊은 바다를 숨이 차게 뛰어오를 테다. 때로는 외롭게, 때로는 공허하게, 때로는 자책하고 절망하며.
그래도 우리의 선택으로 뛰어오르면 조금은 낫지 않을까?
그래도 함께 뛰면 조금은 덜 외롭지 않을까?
외로웠던 혼자만의 바다를 견딘 끝에 때로는 이해받으며, 때로는 다정한 위로를 받으며, 수면을 향해 발을 구를 수 있기를.
그리하여 갖은 의미와 무의미의 파도를 겸허히 감내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아트인사이트 기고글 원문]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77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