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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진솔 Dec 29. 2024

시(poem)가 주는 힘

문득 드는 생각을 글로 표현했을 때

‘시’를 쓴다는 것은 사실 생각해본 적이 없는 일이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한때는 TV 프로그램에서 문학 영재가 나오거나 자신의 복잡한 마음과 감정을 시로 승화시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저게 뭐야? 오글거리네.’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아무래도 그때는 다른 사람들이 어떠한 생각과 감정으로 작품을 만들었는지에 대한 공감이나 이해가 부족했던 것 같다.


올해는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나 뿐만 아니라, 옆에서 나를 항상 지지해주시는 우리 부모님께도, 고등학생으로 지금 한창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는

우리 동생에게도, 많은 일이 있었던 한 해였다.

고등학생 때는 수능과 대학을 위해서 공부하는 과정이 인생의 가장 큰 관문이자 산으로 느껴졌으니까, 그때는 잘 알지 못했지만

스스로의 삶에 대한 선택과 결정에 책임져야 하는 나이가 되고 나서는 10대 때와는 결이 다른 어려움, 고민거리, 스트레스가 생긴다.


올해 9월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안 좋은 일이 연달아 일어났던 시기가 있었다.

어머니의 지인분이 또다른 지인 분 중에 영어 과외를 구하는 중이라고 하셔서 나를 영어 과외 선생님으로 추천하셨고, 그렇게 과외를 시작하게 되었다.

과외를 시작한지 한 달이 조금 지났을 때, 일어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엄청난 습격이 나를 덮쳐버렸다. . .

과외를 시작하기 전에 샀던 최신 모델 노트북을 수업 때 쓰다가 장난끼가 많았던 초등학생과의 어떤 헤프닝으로 인해 노트북이 커피로 침수가 되어 버려 그대로 사망했다.

사실 이런 일은 인생에서 언제든 발생할 수 있지만, 왜 하필 시기가 이때여야 했는지를 원망할 정도로 시기가 좋지 못했고, 멘탈이 나가버렸다.

‘노트북 침수’라는 한 가지의 사건이 그동안 힘들었지만 스스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던 내면의 어떤 것을 폭발시켜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올해 들어 원래도 몸이 안 좋으셨던 외할머니께서 급격하게 편찮아지셨고, 이제는 외할아버지께서도 많이 상태가 안 좋아지셨고, 잘못 걸린 전공 수업으로 (물론 배울 것이 많은 수업이긴 했지만) 역대급으로 빡센 조별 과제를 해야 했고, 그냥 학교를 다니면서 하는 일이 많아 이번 학기를 마치면 반드시 휴학하리라.. 마음 먹고 있던 찰나에 이런 일이 터져버리니 갑자기 아무렇지 않았던 것들이 원망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사실 노트북이 침수되었던 그날이, 내가 꼭 지원하고 싶던 인턴십 마감일이라, 노트북 침수 직후 과외 학생에게 양해를 구하고 바로 근처에 있는 피시방을 찾아 인턴십 마감 시간 전까지 지원서를 계속 고쳤던 기억이 있다.

처음에는 내가 수업 때 노트북만 안 썼다면, 내가 과외 학생과 편안하게 수업을 진행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수업 방식을 이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학생에게 부탁을 하지 않았더라면, 우리 엄마 아빠가 뼈빠지게 번 돈 비싸게 주고 산 이 노트북이 이렇게까지 고장 날 일도 없었겠지?

이렇게 자책이 끊임없이 이어지다가, 어머니와 통화를 하며 조금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그런데 처음에 ‘시’에 대해서 이야기하다가 왜 갑자기 이런 서사를 이야기하는 걸까?

내가 쓴 유일한 시 하나를 소개하려고 했는데, 그 전에 이 시가 어떻게 등장한 건지 그 배경에 대해 설명하고자 했다.)


이렇게 해도, 왜인지 한동안은 자꾸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나서, 한 번은 지하철을 기다리며 엄마랑 통화를 하는데

노트북 침수 관련해서 수리비가 얼마나 나올지, 보험료를 받는 게 가능할지 요런 얘기들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또 눈물이 나와서 어머니께서 괜찮다고 이제 그만 울어도 된다 하셨지만, 통화 직후 또 한 번 기분이 급격하게 우울해지고 머리가 멍해져서

지하철 투명한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벽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베이지색 페인트를 칠한 벽에 흠집이 생겨 페인트가 벗겨지고, 원래의 콘크리트 색깔이 드러나 있는 흠집이었다.



벽에 흠이 있다

희고 깨끗한 벽에 눈에 띄는 찰흙 색 흠


문득 흠이 되고 싶었다


한 번 파이기 시작한 홈은

계속해서 깊어지게


파이면 파일수록

단단해지는 흠


마침내 넓어져

누구라도 들어올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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