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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미향 Mar 03. 2024

추상화가의 추상적 웅얼거림

                      지도에는 새 길이 없다


                                                                                                            조미향(서양화가)     

‘지금까지의 저는 한 해의 달력을 받아들면 어떤 날 어느 시간에 무엇을 하게 될지 아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여러 선생님들처럼 제게도 이 학교가 생활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일부터 저는 어디에 어떻게 있을지 모르는 삶을 살아갈 겁니다. 지도에 보이지 않는 작은 개울가에서 쉴 수도, 아니면 막다른 골목에서 자동차를 돌리지 못해 난감해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길들은 지도에 없으니까요. 하지만 알 수 없다는 그 자체가 저를 긴장하게, 또 생생하게 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29년의 국어교사생활을 마감하는 자리에서 나는 이임사를 이렇게 하였다.      

그림을 시작한지 20년 만에 처음으로 ‘매일 출근하기’ 대신에  화실 생활을 중심에 두고 ‘화단’이라는 세계를 헤매기 시작했다. 진정 지도를 버린 자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나날이 새로운 책장을 넘기는 것 같았다. 때로 화단의 말석에 앉은 화가로서의 열패감, 정녕 내가 이 길을 갈 수 있을까 하는 끝없는 두려움, 재정적 부담감, 어렵고 답답한 페이지들이 많았다. 그런 가운데서 반짝하고 나타나는 새소리처럼 한 작품씩 완성했을 때, 한 획이 성공했을 때 이 길이 아니었다면 만날 수 없는 기쁨을 만끽하게 된다. 그리고 이 길에서 만나고 헤어지고 깊은 인연으로 이어지는 그 독특한 개성들의 면면들,,,,,,,넘기지 않은 책장들의 이야기도 그러하리라.     

나는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도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을 생에서 발견한다는 것은 엄청난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세상의 모든 것을 사랑하지는 않지 않는가? 무엇을 사랑하고 거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넣을 것인가? 나는 이 대답을 자신의 내면 즉, 지도에 그려진 삶을 학습하기 이전의 그 내면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학습된 가치는 사회와 관습이 내게 덧씌운 것이어서 내가 어떤 인간으로 이 지구에 왔는지를 알게 하지 않는다.      


나는 그럼 어떤 아이었나? 어릴 때의 나는 엄마가 반짇고리에 담은 조각천들을 한정없이 들여다보고 모으고, 새장 앞에 흩어져 있던 깃털들의 색깔을 살펴보기 좋아하던 내성적인 아이였다. 그 색채와 감각에 매료된 어린 아이가 수없이 많은 색채들을 화면에 넣고 미처 발견되지 않은 그들 사이의 질서들을 찾아나가려는, 내 추상작업의 뿌리라고 생각한다. 조용하고 감각적인 아이가 자라서 손에 있던 지도를 버리고 지도에 없는 길을 찾아나섰다고나 할지.     

주변 사람들이 은퇴했고, 은퇴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다들 아직은 젊은 나이들이라 고민들이 깊은 것 같았다. 그럴 때 나는 내 손에 펼쳐진, 아직도 읽을거리가 너무 많이 남은 나의 책을 내려다보게 된다. 나는 오래 보아온 이 책이 어떻게 전개될지 아직 모른다. 그리고 잘 이해도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 알 수 없는 길로 가득한 이 책을 가슴에 안고 있다는 것이 지도를 던져버리고 모르는 길로 들어섰던 나의 용기에 대한 보상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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