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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꽃농부 Nov 19. 2024

갑자기 증명사진 한 장이 필요합니다만.

하루가 멀다 하고 소란


  

  지난 주 금요일 저녁이었다. 원서방은 언제나 그랬듯 주말 기분을 내는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괜스레 술 한 잔이 생각난 건지 불콰하게 취해 현관문을 힘껏 밀고 들어왔다. 그렇지 않아도 평소 얼굴이 붉은 편이라 햇볕이 강한 날이면 오여사는 50F++ 선크림을 매섭게 두들겨 발라주었는데 그 날도 출근 때 허연 몽달귀신 마냥 바르고 나간 얼굴이 한 밤이 되어선 고추장발린 밀가루귀신이 되어 들어왔다. 얼른 발 씻고 자라며 날선 얼굴로 베어버릴 듯이 노려보았다. 원서방은 즐겨 마시는 맥주광고 배우마냥 웃통을 밑에서 위로 단번에 말아 올려 시원스레 벗어 던지고 노란색 눈을 무섭게 치켜 뜬 호랑이 팬티 한 장만 걸친 채 화장실로 들어 가려다말고 한 쪽 발을 까치발로 빙글 돌더니 정확히 오여사의 얼굴 한 뼘 앞에 착지했다. 순간 오여사의 동공은 새까만 꽃사슴 눈망울이 되어 끔벅거렸고 왼쪽에 있다던 심장은 오른쪽 왼쪽을 왔다갔다 주체하지 못하고 심박 수 300을 넘겨 숨을 쉴 수 없었고 두꺼운 볼따구닌 어느새 적당히 야시시한 홍조를 드러내어 원서방의 말초적 본능을 자극하고도 남을 정도인데 눈을 뜬 채 꿈이라도 꾼 것인가? 아주 잠깐이었지만 이쯤에서 오여사의 분홍빛은 옅어져야했다. ‘자기야 내 증명사진 어디다 뒀대?’ 무슨 봉창 두들기는 소리하냐?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얼른 씻기나 하라며 표독스레 원서방의 가슴팍을 밀어 냈다. 하지만 손끝에서 느껴지는 찌릿함의 여운은 설거지를 하는 동안 내내 머물렀다.     



  며칠이 지난 오늘 아침이다. 원서방은 간밤에도 우리 동네 술을 다 마시고 왔나보다. 오여사는 그런 남편이지만 애지중지 서방 몸 생각해 콩나물해장국을 끓여 주는 현모양처 아니던가? 작년 늦가을에 무릎이 아파 매일 한의원에 다니시던 친정엄마와 좁은 주방에서 쭈그리고 앉아 담은 신김치를 풀어 콩나물국을 끓여 간을 보니 제 입맛에 그만이다. 그야말로 해장술을 부르는 아침밥상을 부지런히 차리고 있다. 원서방은 등짝이며 허벅지며 물기를 다 닦지 않은 채 머리에 두른 수건 사이로 눈만 빠끔히 내민 채 보채는 양 목쉰 소리가 평소보다 한 옥타브 높다. ‘자기야 증명사진 어디다 두었냐니깐?’ 그 물음 이전에 뭔가 앞선 말이 있었어야 전후맥락이 맞을 듯한데 원서방은 저 편하자고 듬성 잘라먹고 불쑥 내뱉는다. 오여사는 평소 이런 은근 도발적 말투가 거슬려 욱하는 기분에 대판 싸운 게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오늘은 참아야 한다며 왼손으로 반대편 가슴을 쓸어내리며 조용히 떨리는 입술로 ‘자기야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어? 잘 찾아봐’ 원서방은 오랜만에 들어보는 마눌님의 정제되어 간드러지게 들리는 서울사투리가 다소 어색하게 들렸지만 좋았다. 강원도 산골 출신인 원서방은 서울 말씨 아가씨의 애간장 녹이는 콧소리에 녹아 두 살 많은 누나에게 죽기 살기로 결혼해달라며 매달려 여태 이러고 살고 있다. 오여사는 조심스레 화내지 않고 대답한다는 것이 평소답지 않게 코맹맹이 교태를 하고만 것이다. 어찌됐건 치오르는 감정을 누르고 조용히 말을 한 이유는 단 한가지이다. 바로 오늘이 몇 달 간 준비해온 교육청 입찰준비서류 제출 마감일이고 새벽 댓바람부터 마누라에게 핀잔먹고서 입찰이 잘 못된다면 그 원성을 다 받아내야 할 테니 오늘은 참을 인을 세 번 쓰자고 입술을 앙 물었다.    


  

 식탁에 앉아 저 멀리 소리 나지 않게 켜 둔 TV 속 기상캐스터의 손끝이 알려주는 날씨를 보며 오늘 출근 복장은 얇고 통이 큰 데님청바지에 흰 셔츠를 올리고 어깨엔 노란색 숄더를 걸쳐보는 생각으로 Image Coordination 한창 하던 중 ‘됐다. 찾았다.’ 원서방은 어디서 난 건지 한 손에 증명사진을 보여주며 의기양양 입 꼬리를 귀에 걸친 채 웃어보였다. 찾았다는 뜻은 알겠는데 뭐가 됐다는 거지? 찾았으니 됐다는 건가? ‘어디에서 찾았어? 남은 게 있었나보네?’ 원서방은 다른 한 손에 거머쥔 여권을 흔들거리며 낄낄 웃어댄다. 흔들거리는 여권에는 가위로 한 번에 도려내 휑하니 구멍이 뚫여 있었다. 올겨울 가족여행을 해외로 가자며 얼마 전 갱신한 그 여권이다. 그간 단전 아래 복식호흡으로 단련된 기합의 괴성이 집안의 고요를 일순간 깨뜨린다. ‘야 이 화상아 미친 거 아냐? 그걸 떼 내면 나중엔 어떻게 할 거야 엉?’ 금방이라도 잡아먹힐 새끼 양이 늑대의 번뜩이는 아가리 앞이지만 원서방은 걱정하지 마란다. 다시 만들면 된단다. 한 번 더 걱정하지 마란다.   

   

그래 걱정하지 않을게 넌 집 지키고 있어 우리 다녀올 동안.     



미지근하게 식어버린 콩나물해장국 속에는 원서방이 해먹 속에서 짙은 선글라스를 쓰고 흔들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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