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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린 Mar 05. 2024

중증장애인이 글을 쓴다는 것

저는 이렇게 씁니다.

-  글쓰기 욕망에 갇힌 나

1년 전에 모르는 분한테서 메일이 왔었다. 영화 전문 잡지를 발행하는 편집자인데 한 매체에 올려진 내 글을 보고 연락한다며 이번에 기획하는 주제의 한 꼭지 부분을 써 주면 좋겠다고 했다. 메일 확인하고 어떤 곳인지 검색해 봤다. 작품성이 있는 영화 한 편을 선정해서 그 영화를 바탕으로 다양한 비평가들의 글과 함께 관련되어 있는 사람들의 인터뷰로 구성된 영화 전문 잡지였다. 이번에 기획된 영화는 오래전에 상영되었던 이누도 잇신 감독의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하 조제) ‘이라는 영화였다. 

조제가 개봉한 지 20여 년이 지난 지금, 이 영화를 다시 보며 재해석을 바탕으로 글을 쓴다는 것에 매혹을 느꼈다. 또한 장애/인권 단체 관련 곳이 아닌 데서 원고 청탁이 들어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서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다. 결국 난 글 청탁을 수락했다. 이 정도면 글쓰기를 좋아하는 것을 넘어 사랑하는 것은 아닐까?


- 오른손 한 손가락의 글쓰기

항상 그랬듯 글쓰기 욕심에 앞서 다른 조건을 못 보는 버릇이 이번에도 고스란히 작동되었다. 원고 청탁을 수락하고 나서 비로소 보이는 원고 분량…. 기본 분량으로 A4 8페이지를 써야 한단다. 맙소사! 나는 중증뇌병변 장애가 있고 양손이 마비되어 글을 쓸 때는 오른쪽 손의 한 손가락을 이용해서 일명 독수리 타법으로 타이핑을 치고 있는데 8페이지라니!

더구나 평일은 장애인 단체에 매일 출퇴근하며 각종 서류 업무와 혼자만의 싸움을 하면서 야근을 밥 먹듯이 하고 있어서 글쓰기는 주로 주말을 이용해서 쓴다. 보통 A4 한 페이지에  5시간 이상 걸린다. 그런데 8페이지를 써야 한다니…. 나는 당장 못 쓴다고 거절의 메일을 보냈어야 했다. 하지만 보내지 않았다.


거절을 못한 탓에 8페이지의 글을 쓰기 시작했다. 비장애 작가가 8페이지 분량의 글을 쓴다면 아마도 며칠 안에 쓸 수 있는 분량일 테지만, 나는 꼬박 한 달이 걸렸다. 영화 잡지라는 매체도 낯설고, 주제도 쉽지 않은데, 분량도 부담스러웠다. 약속은 했으니 주말마다 쓰고 또 썼다. 간신히 8페이지 분량을 채웠다. 이미 봤던 영화를 몇 번을 다시 보기도 하고 조제 관련 다른 사람의 비평 글도 찾아 읽었다. 그럴수록 다른 사람의 글을 따라 쓰는 거 같아서 괴로움만 쌓여갔다.


나는 원래 글을 쓸 때 머릿속에서 스토리를 대략적으로 구성한다. 글쓰기 전문 작가들의 강의를 들어보면 먼저 스토리를 구성하고 개요를 쓰며 그걸 바탕으로 초고를 써서 몇 번의 수정 과정을 걸쳐 퇴고에 이른다고 한다. 좋은 글을 쓰려면 그런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물리적으로 많은 에너지가 드는 나에게 어려운 과정이다. 나는 그 과정까지 수행하려면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도 전에 지쳐서 글을 쓸 엄두를 못 낼 거다. 그래서 나는 원고 청탁받으면 그날부터 며칠은 머릿속에서 스토리를 구성하고 에피소드 몇 가지를 기억해 낸다. 글을 쓰면서 들어가면 좋을 내용을 그때그때 생각해서 글을 쓰고 있다. 보통 한 번의 글을 쓸 때 A4 2페이지 정도의 글을 쓰기 때문에 이 방식도 크게 문제가 안 되었다.(다른 작가들이 보면 너무 두서없이 글을 쓴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하지만 8페이지의 원고는 그 방식대로 쓰면 안 되는 것이었다.


- 빨간색으로 도배된 원고 앞에서 좌절하지 않기

8페이지 분량은 채웠지만 내용이 허술했다. 영화 잡지 편집장님도 내 글의 허술함을 조목조목 찾아냈다. 내 글은 빨간색으로 도배되어서 수정 요청본으로 돌아왔다. 빨간색으로 뒤덮인 원고를 보며 뭔가 나의 부족함이 환하게 드러난 거 같아서 그나마 조금 있던 자신감도 사라졌다. 마음 같아선 “제 역량이 너무 부족한 거 같아요. 저는 못할 거 같아요 “라고 답 메일을 보내고 도망치고 싶었다. 그런데 여기서 포기하면 더 이상 나의 글쓰기는 앞으로 나아가질 못할 거 같았다. 결국 수정의 수정을 계속 이어나갔다. 수정을 거듭한 끝에 드디어 원고가 통과가 됐다. 수정 작업이 이어지면서 편집장님도 지치고 나도 글을 더 고칠 열의를 보이질 않았다. 아마 그 편집장님도 내 수정글을 볼 때마다 답답해서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차가운 얼음물을 벌컥벌컥 마셨으리라 짐작된다. 사실 그때는 ‘뭘 그렇게까지 고치라고 할까?’ 속으로 투덜대기도 했다. 


나의 투덜댐이 어리광에 불과하다는 것을 책을 굉장히 많이 낸 작가 분을 만난 뒤로 알게 되었다. 그 작가 분과 우연히 만난 자리에서 글쓰기 노하우(?)에 대해 물어봤다. 그분의 조언은 편집자들이 수정을 요청하고 제안을 많이 하는 것에 감사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만큼 내 글에 애정이 많다는 증거라고 했다. 사실 활동을 하다 보면 나에게 많은 제안과 기회를 주고 싶어 하는 동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 동료들도 나와 어떻게든 함께하고 싶고, 나의 활동을 조금 더 넓히기 위해 많은 제안을 했으리라 생각한다. 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편집자들은 나보다 내 글을 수십 번도 더 읽어보며 수정할 부분을 찾아냈을 것이고 고쳐야 할 부분을 정확하게 짚어내기 때문에 수정 제안을 받아 들어야 한다고. 그게 글쓰기 역량을 높이는 길이라고 작가 분이 말했다. 그 얘기를 듣고 보니 나 역시 지난 원고의 괴로움을 통해 조금 더 발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글쓰기 강의도 수강했었다. 

나는 꽤 오랫동안 글을 썼지만, 써야 될 글 앞에서 항상 기나긴 망설임 끝에 글을 쓴다. 글쓰기는 작가 자신을 투명하게 내비치는 작업이기도 해서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나 역시 깜빡거리는 커서 앞에서 긴 호흡을 하며 숨고 싶어 하는 나 자신과 여러 차례 협상을 하며 발끝에서부터 용기를 끌어모아한 글자씩 친다. 내가 쓴 글의 의미가 읽는 사람들에게 닿기 바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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