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웨이 Sideways
1. Opening 오프닝
알렉산더 페인의 영화 사이드웨이(2005)의 오프닝은 언뜻 소소한 해프닝처럼 보인다. 영어 교사 마일즈는 오래된 친구 잭과 여행을 떠나려 하지만, 크고 작은 사건들이 그의 출발을 번번이 지체시킨다. 늦잠, 약속의 엇갈림, 갑작스러운 변동들. 화면은 특별히 극적인 충돌을 담지 않으면서도 인생이란 언제나 ‘예상치 못한 지연’의 연속임을 은근히 보여준다. 우리는 계획된 시간표대로 움직이고 싶어 하지만 삶은 언제나 그 계획의 틈새를 파고들며 지연과 혼란을 선사한다.
이 오프닝은 단순히 두 남자의 여행을 시작하기 전의 해프닝이 아니다. 그것은 곧 영화 전체의 정조를 예고한다. 인생은 결코 매끄러운 고속도로가 아니라 때로는 우회로와 골목길의 연속이라는 것. 계획은 틀어지고 기대는 빗나가며, 그 틈새에서 우리의 불안은 자라난다. 그러나 감독은 그 불안을 단순한 불행으로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바로 그 비틀림과 지연 속에서 뜻밖의 만남, 예기치 못한 기쁨이 스며든다고 말한다. 와인의 풍미가 숙성과 기다림에서 오듯, 인생도 지체의 순간에서만 길어 올릴 수 있는 맛이 있다는 것이다.
마일즈의 분주한 출발은, 사실 우리 모두가 매일 경험하는 일상의 은유이다. 지하철이 늦고, 약속이 취소되며, 사소한 계획이 무너질 때 우리는 불편과 초조를 느낀다. 그러나 되돌아보면 바로 그 틈에서 우리는 새로운 풍경을 보고 뜻밖의 사람을 만나고, 스스로의 내면과 마주하는 시간을 얻는다. 이 영화의 오프닝은 그 일상의 ‘돌발’을 통해 관객을 조용히 설득한다. 삶의 본질은 완벽한 직선이 아니라 우연과 불협화음이 만들어내는 곡선의 여정이라는 것을.
2. 결혼과 와인
여름 햇살이 뜨겁게 내리쬐는 캘리포니아 산타바바라. 마일즈는 와인 잔을 들고 친구 잭 앞에서 전문가처럼 잔뜩 아는 체를 한다.
날 따라 해. 빛에 비춰서 와인의 색깔과 투명도를 살펴. 농축도를 알아보는 거야. 이제 잔을 기울여 입구 주변의 농도를 보면 양조시기를 알 수 있어. 그러고 나서 잔에 코를 넣어봐.
와인 애호가인 마일즈에게 한 모금의 와인은 단순한 음료가 아니다. 그는 와인을 마시기 전 반드시 관찰하고, 냄새 맡고, 그 안에 깃든 시간과 손길을 추적한다. 잔 속에 담긴 풍미는 그의 삶과 맞닿아 있으며 어쩌면 그가 품은 불안과 결핍을 덮어주는 작은 위로일지도 모른다. 반면 옆자리의 잭은 와인에 담긴 역사나 풍미 따위엔 관심이 없다. 그는 그냥 벌컥벌컥 들이켜고 싶은 충동을 애써 참으며 친구의 설명에 맞장구를 친다. 두 사람은 외모, 취향, 성격, 대화방식까지 그 무엇 하나 닮은 구석이 없지만 이상하게도 오랜 세월 추억을 공유한 친구사이이다.
어쩌면 그들의 관계는 ‘서로가 서로보다 낫다’는 은근한 비교 속에서 유지된 것인지도 모른다. 잭은 마일즈의 소심함과 이혼한 아내에 대한 미련을 끊임없이 타박한다. 마일즈는 그런 잭의 단순함과 바람둥이 기질을 비웃으며 결정적인 순간마다 선을 긋는다. “나는 잭과 달라.” 그 말은 곧 자기 방어이자, 무너질 듯 위태로운 자존심을 붙드는 마지막 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두 사람은 서로를 비난하면서도 상대를 거울삼아 스스로를 위로한다.
곧 결혼을 앞둔 잭은 여전히 여자만 보면 눈빛이 흔들리고 모험을 꿈꾼다. 반면 이혼한 지 2년이 지났지만 마일즈는 전 아내 빅토리아를 잊지 못한다. 결혼과 이혼, 정착과 방황, 그 사이의 간극을 두 남자가 동시에 보여준다.
생각해 보면 결혼과 와인은 닮아 있다. 화려한 병과 라벨만 보고 그 맛을 짐작하기 어려운 와인처럼, 결혼 또한 겉으로 보이는 조건으로 행복을 예측할 수 없다. 든든한 직업, 빼어난 외모, 안정된 배경—이 모든 것이 행복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같은 품종의 포도로 빚은 와인도 발효 과정에 따라 맛이 천차만별 달라지듯, 비슷한 배경을 가진 부부라도 작은 차이가 깊은 균열을 만들 수 있다. 결혼의 ‘맛’은 함께 보내는 시간과 돌봄, 그리고 그 안에서 피어나는 차이와 갈등을 어떻게 발효시키느냐에 달려 있다. 달콤했던 첫 모금이 시간이 지나며 쓴 뒷맛과 두통을 남기기도 하고, 오래 묵힌 듯 깊은 향을 내뿜기도 한다.
마일즈가 마야와 나누는 대화는 이를 더욱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피노 품종을 왜 좋아하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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