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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되지 않는 감정의 이름과 청춘

하나와 앨리스

by 달빛바람

개요 로맨스 일본 135분

개봉 2004년 11월 17일

감독 이와이 슌지 岩井俊二


1. Opening 오프닝

-두 여고생


이 영화는 겨울의 한복판에서 시작된다. 같은 교복에 목도리를 두른 여고생들이 전철을 향해 잰걸음으로 걸어가고, 그들의 숨결은 말보다 먼저 허공에 흩어진다. 등굣길이라는 너무나 익숙한 풍경 속이지만, 장면 곳곳에는 여고생 특유의 발랄함과 엉뚱한 기운이 조용히 배어 있다. 과장되지 않은 몸짓과 스쳐 가는 표정만으로도 이미 이들이 속한 세계의 결이 드러난다. 감독의 카메라는 특별한 사건을 만들어내기보다 평범한 순간 속에 깃든 리듬과 온도를 오래 붙잡아 둔다.


하나와 앨리스는 이름보다 먼저 감각으로 다가온다. 장난기 어린 눈빛, 어딘가 어긋난 박자, 이유 없이 터져 나오는 웃음 속에서 두 소녀의 세계는 서서히 형태를 갖춘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도착해야 할 목적지가 아니라 그곳으로 향하는 과정이며, 정리된 말보다 먼저 반응하는 몸의 움직임이다. 카메라는 그 즉흥성과 불균형을 굳이 매만지지 않는다. 대신 그 어긋남 속에서만 살아나는 생기를 묵묵히 바라본다.


이 오프닝은 단순한 인물 소개에 머물지 않는다. 겨울의 차가운 공기를 배경으로, 영화가 선택한 태도를 분명히 드러낸다. 이야기는 논리적인 인과나 단단한 구조를 따르기보다 감정이 먼저 흔들리는 방향으로 흘러갈 것임을 예감하게 한다. 계획된 서사 대신 마음이 움직이는 쪽으로 장면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주인공들의 세계는 그렇게 열린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이미 모든 것이 시작된 것처럼 보이는 얼굴로.



2. 짝사랑 혹은 어른 흉내


하나는 타인의 시선을 경유해서야 비로소 자신의 마음을 자각한다. 매일 같은 전철 안에서 스쳐 지나가는 한 남학생을 바라보는 일, 카메라 셔터 뒤에 감정을 숨긴 채 그의 뒷모습을 담아 두는 일, 우연히 흘러든 말 한마디를 오래 붙들고 되뇌는 일들은 모두 철저히 혼자만의 기록이다. 그 감정은 아직 말이 되지 못한 채, 마음속 어딘가에서 조용히 증식한다. 벚꽃이 흩날리는 3월, 새 교복을 입은 두 소녀는 고등학생이라는 이름의 다음 계절로 발을 들인다. 봄빛은 그들의 가벼운 숨결과 아직 정리되지 않은 설렘, 그리고 미묘한 불안을 숨김없이 비춘다.


하나는 짝사랑하는 선배를 곁에 두기 위해 기억상실이라는 거짓말을 만들어낸다. 이 선택은 연애의 기술이라기보다 타인과 연결되고 싶다는 욕망이 낳은 가장 서툰 방편에 가깝다. 선배의 기억을 지우고 그 빈자리에 자신의 존재를 조심스럽게 밀어 넣으려는 시도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감행한 순진하고도 위험한 침범이다. 그것은 상대를 속이기 위한 계산이기보다 감정을 다룰 줄 모르는 마음이 저지른 무모한 모험에 가깝다.


이 순간부터 하나는 단순히 감정을 느끼는 소녀에서 벗어나 감정을 설계하고 연출하는 어른의 흉내를 내기 시작한다. 거짓말은 그녀를 조금 더 성숙해 보이게 만들지만, 동시에 더 깊은 불안 속으로 밀어 넣는다. 이와이 슌지 감독은 이 짝사랑을 미화하지 않는다. 대신 사랑을 처음 배우는 시기에만 가능한 어설픔과 잔인함, 그리고 그 모든 선택이 남기는 흔적을 차분히 바라본다. 짝사랑은 이 영화에서 로맨스라기보다 어른이 되기 직전의 마음이 감당해야 할 가장 뜨거운 통과의례처럼 다가온다.



3. 거짓말과 연기


이 영화를 움직이는 힘은 두 소녀의 사랑스러움이지만, 그 흐름을 틀어쥐고 방향을 바꾸는 것은 거짓말과 연기라는 선택이다. 우리는 이 영화에서 결이 다른 두 개의 거짓말을 마주한다. 하나의 거짓말이 소녀의 마음을 지키기 위한 서툰 소동이라면, 고등학생 딸을 둔 사실을 부정하는 앨리스 어머니의 거짓말은 어른의 세계가 선택한 비겁하고 날 선 자기 방어이다. 성격과 무게는 다르지만 두 거짓말은 모두 진실을 숨기기 위해 선택된다는 점에서 묘하게 닮아 있다.


길거리 캐스팅을 통해 연기 오디션의 문 앞에 서게 된 앨리스의 혼란은 이 영화의 중요한 장면이다. 열다섯의 세계는 아직 해독되지 않은 문장들로 가득 차 있고, 그 앞에서 그녀는 타인의 시선을 읽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요구되는 표정과 몸짓, 웃음의 타이밍은 모두 외부에서 정해진다. 마음이 따라가지 않는 일을 반복할수록 몸은 먼저 반응하고, 감정은 점점 뒤처진다. 앨리스는 자신의 이름처럼, 아직 이 세계의 규칙과 속도를 이해하지 못한 채 경계에 머무는 존재이다. 오디션 탈락 통보 앞에서 앨리스가 내뱉는 “열심히 하겠습니다”라는 말은 그래서 가볍게 허공을 맴돈다. ‘열심’이란 어떤 일에 온 정성을 다해 골똘히 힘쓰는 상태이자, 그에 합당한 마음의 깊이를 뜻한다. 그러나 앨리스의 이 말에는 아직 그런 마음이 도달하지 못해 있다. 그것은 다짐이라기보다 평가의 언어에 즉각 반응하는 습관에 가깝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기도 전에 외부의 기준과 판단에 먼저 흔들리고, 그 파도 속에서 스스로의 중심을 잃는다.


이와이 슌지 감독은 이 거짓말과 연기의 과정을 통해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요구되는 잔혹한 훈련을 조용히 드러낸다. 연기는 역할을 배우는 일이지만, 동시에 마음을 유예하는 일이기도 하다. 앨리스는 아직 진짜 자신의 마음을 선택하지 못한 채, 거짓말과 연기 사이에서 어른의 흉내를 배운다. 그리고 그 미완의 모방 속에서, 이 영화는 성장의 가장 아프고도 뜨거운 순간을 포착해 낸다.



4. 숨길 수 없는 진실과 억지로 되지 않는 마음


하나의 거짓말에 앨리스가 선의로 가담하는 순간, 이야기는 서서히 예상 밖의 방향으로 기울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단순한 협조처럼 보였던 선택이 감정의 균형을 조금씩 어긋나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나가 바라보던 선배의 시선은 어느새 앨리스를 향해 옮겨가고, 그 미묘한 이동은 누구의 의지로도 되돌릴 수 없는 흐름이 된다. 이 장면은 거짓말과 연기라는 장치가 끝내 통제하지 못하는 영역이 존재함을 분명히 드러낸다. 그것은 계산이 아니라 마음이 먼저 선택해 버리는 순간이다.


인위적으로 짜인 각본은 자연스럽게 발생한 감정 앞에서 쉽게 무너진다. 아무리 치밀한 설정과 약속이 있더라도 마음은 그 틀을 비켜가며 자기만의 방향으로 움직인다. 하나의 계획은 성공을 향해 나아가는 듯 보이지만,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은 통제의 실패이다. 감독은 이 어긋남을 극적인 장치로 과장하지 않는다. 대신 아주 작은 시선의 변화, 말의 간격, 침묵의 길이로 감정이 이동하는 순간을 조용히 포착한다.


아이러니하게도 하나의 거짓말은 그 거짓말에 가장 성실했던 앨리스의 태도로 인해 깨진다. 역할에 충실하고, 감정을 숨긴 채 상황을 유지하려 했던 그녀의 진심 어린 연기가 오히려 균열을 만들어낸다. 그 틈 사이로 숨겨져 있던 진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진실은 폭로처럼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더 이상 감출 수 없게 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고개를 든다. 이 영화는 거짓말이 실패하는 이유를 도덕적 판단에서 찾지 않는다. 마음은 애초에 거짓말의 편에 서지 않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힘은 바로 이 예측 불가능성에 있다. 소녀들의 즉흥적인 선택과 가벼운 호기심에서 출발한 이야기는 방심한 관객 앞에 잔인할 만큼 투명한 진실을 내민다. 청춘은 서툴기에 아름답지만, 그 서툼은 때로 가장 아픈 방식으로 진실을 드러낸다. 억지로 붙잡으려 할수록 멀어지고, 숨기려 할수록 또렷해지는 마음. 감독은 그 어긋남의 순간을 통해 말한다. 어떤 감정은 연기할 수 없고, 어떤 마음은 끝내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고.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하나와 앨리스의 이야기는 가장 뜨겁게 흔들린다.



5. 이와이 슌지 감독의 스타일


이와이 슌지 감독이 그려내는 청춘은 언제나 미완의 상태로 남아 있다. 그의 인물들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에 서툴고, 기성의 세계에 편입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어색함과 불안을 온몸으로 통과한다. 그러나 그의 카메라는 이들이 얼마나 능숙해지는가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성취나 결과보다 그 자리에 존재하는 인물의 숨결과 흔들림을 다정하게 붙잡는다. 불안과 망설임마저 제거해야 할 결함이 아니라 청춘이라는 풍경을 이루는 하나의 결로 화면 안에 오래 머물게 한다.


이와이 슌지 감독의 연출은 감정에 불이 붙는 순간을 드라마틱하게 포착하는 방식과 거리가 있다. 그는 마음이 바뀌는 일을 폭발로 다루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짝사랑하던 상대의 마음이 어느 날 문득 열리는 순간처럼, 소리 없이 찾아온다. 온도의 급격한 변화라기보다 마음을 둘러싼 풍경이 조금 달라졌음을 알아차리는 순간에 가깝다. 그래서 그의 영화에서 감정은 고조되기보다 이동하고, 극적인 장면보다 미세한 차이가 축적되며 서사를 이끈다.
이러한 태도는 사건을 밀어붙이기보다 감정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자리를 내어주는 그의 연출 방식과 맞닿아 있다. 그는 선명한 갈등이나 단정적인 결말 대신, 일상의 결 속에서 마음이 서서히 방향을 바꾸는 시간을 존중한다. 잦은 클로즈업과 인물의 호흡을 따라가는 카메라, 자연광에 가까운 빛과 계절의 변화는 감정을 설명하기보다 체감하게 만든다. 시간의 흐름 자체가 인물의 내면을 비추는 장치가 된다.


앨리스가 오디션장에서 마침내 자신의 진심을 쏟아내는 순간, 영화는 가장 조용한 절정에 이른다. 이 장면은 감정이 폭발하는 클라이맥스가 아니라 마음의 풍경이 다른 쪽으로 기울어졌음을 확인하는 지점이다. 이와이 슌지 감독은 울음을 강조하지도, 음악으로 감정을 몰아붙이지도 않는다. 대신 인물을 둘러싼 공기와 침묵, 시선의 흔들림을 통해 변화가 이미 일어났음을 조용히 보여준다.


이러한 연출은 그의 영화 전반에 일관되게 흐르는 특징이다. 이와이 슌지 감독은 청춘을 완결된 서사로 봉합하지 않는다. 성장의 결과를 제시하기보다 성장 중에 머무는 시간을 신뢰한다. 그래서 그의 인물들은 언제나 불완전하지만, 바로 그 미완의 상태로 가장 선명하게 빛난다. 하나와 앨리스는 그 미학이 가장 투명하게 드러나는 작품이다. 감정은 설명되지 않고, 결론은 유예된다. 그러나 그 여백 속에서 관객은 이미 달라진 마음의 풍경을 고요하게 목격하게 된다.



6. 그리고 아오이 유우 蒼井優


아오이 유우는 이 영화에서 하나의 역할을 연기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그녀의 존재는 영화의 감정선을 지탱하는 중심처럼 작동하며 장면이 흘러갈수록 점점 더 또렷해진다. 앨리스라는 인물은 대사를 통해 설명되기보다, 몸의 움직임과 시선의 떨림으로 먼저 이해된다. 그 미묘한 결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아오이 유우의 감각이다.


종이컵을 테이프로 고정해 발레슈즈를 대신하고 춤을 추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순수한 움직임의 순간으로 남는다. 완벽한 환경도, 준비된 무대도 없이 자신의 몸 하나로 공간을 가로지르는 그 동작은, 결핍이 어떻게 에너지로 전환되는지를 보여준다. 기술보다 먼저 마음이 움직이고, 설명보다 앞서 감정이 튀어나오는 순간. 그 짧은 춤 속에는 앨리스라는 인물이 지닌 불안과 자유, 슬픔과 환희가 동시에 스며 있다.


아오이 유우는 이후 인터뷰에서 이 역할에 대해 감정을 ‘표현하려 하기보다 그대로 두는 것’이 중요했다고 말한 바 있다. 연기란 무엇인가를 더하기보다 이미 존재하는 마음을 방해하지 않는 일에 가깝다는 인식은 그녀의 연기 전반을 관통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그래서 앨리스는 과장되지 않고, 언제나 조금 모자란 상태로 화면 안에 남는다. 그 미완의 감정이야말로 관객의 마음에 가장 깊이 닿는다.
이와이 슌지 감독의 영상미와 아오이 유우의 몸이 만나는 지점에서, 이 영화는 청춘이라는 단어가 품고 있는 가장 조용하고도 뜨거운 의미에 도달한다. 이 장면들이 특별한 이유는 서사를 밀어붙이기 때문이 아니라 감정이 스스로 드러나도록 허락하기 때문이다. 아오이 유우가 체현한 앨리스는 완성된 인물이 아니다. 그러나 바로 그 불완전함 속에서 영화는 가장 선명한 생명력을 얻는다. 결국 이 영화를 오래 기억하게 만드는 것은 줄거리보다도 아오이 유우가 남긴 움직임의 잔상이다. 말로 설명되지 않는 마음, 멈추지 못하고 흘러가던 청춘의 한 순간. 이 영화는 그 얼굴을 통해 우리가 지나온 시간의 온도를 다시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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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바람입니다. 작은 극장을 품은 마음으로 영화와 일상의 자잘한 조각들을 주워 담습니다. 줄거리보다는 스크린 너머에 잠든 숨소리 같은 것들을 조심스레 건져 올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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