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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악적인 이별의 변명

영화 <러브, 비하인드 >

by 달빛바람

〈러브, 비하인드〉와 위악적인 이별의 변명

가을은 언제나 이별의 온도를 닮았다. 차가워지기 직전의 따뜻함, 완전히 식기 전의 미열. 그 온도는 사랑이 식는 순간보다 훨씬 잔인하다. 왜냐하면, 이미 끝났음을 알면서도 아직 끝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넌 진짜 이기적인 × 이야. 지금까지의 시간이 다 아깝다.”

그날, 나는 스물여덟에 만나 서른둘에 헤어진 연인에게 마지막 칼을 뽑았다. 입에서 나온 말은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그 속엔 부끄러운 불이 타고 있었다. 진심이 아니었기에 더 잔인했다. 그 말들은 상대를 베려던 칼이 아니라 나 자신을 가리키는 칼끝이었다.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알았다. 나는 그저 ‘버려지는 사람’이 아니라 ‘버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는 걸. 이별의 주도권을 쥐고 싶었던 나의 조급함은 결국 사랑을 ‘방화’의 형태로 끝내버렸다. 불태운 것은 추억이 아니라 나 자신이었다. 그때 나는 품위 대신 잔해를 택한 서툰 어른이었다.

그런 내게 리 톨랜드 크리거 감독의 영화 〈러브, 비하인드(Celeste and Jesse Forever, 2012)〉는 일종의 거울처럼 다가왔다. 라시다 존스와 앤디 샘버그가 연기하는 셀레스티와 제시는 이미 이별했지만 여전히 서로의 일상에 발을 담근다. 그들의 관계는 끝났으나, 대화는 이어진다. 그 부자연스러운 연결 속에서 영화는 사랑이 사라지는 과정을 현미경처럼 들여다본다. 사랑의 사망선고가 아니라 체온이 식어가는 시간의 기록.

예전의 나라면, 그들을 보며 혀를 찼을 것이다.


“미련하게 뭐 하는 거야. 헤어졌으면 쿨하게 끊어야지.”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 ‘미적거림’ 속에 진짜 진심이 있다. 라시다 존스의 눈빛은 여전히 사랑에 목말라하고 앤디 샘버그의 웃음에는 아직 애정이 남아 있다. 그들이 보여주는 것은 완벽한 성숙이 아니라 어설픈 품위의 인간미이다. 그 품위는 지켜지지 않기에 아름답고 무너질 때마다 더 진실하다. 특히 제시가 새 연인을 만나는 장면에서 셀레스티가 보여주는 질투, 그것은 이미 끝난 사랑을 완전히 종결하는 마지막 통증처럼 다가온다. '쿨함'이라는 얇은 외피 아래, 아직 타고 있는 감정의 잔불이 들끓는다. 그 순간, 나는 스크린 속 그녀의 얼굴에서 내 과거의 그림자를 봤다. 불씨를 끄지 못해 손을 데던 그때의 나를.

〈러브, 비하인드〉가 잔혹하도록 현실적인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그들은 '쿨'해서 현실적인 게 아니라 미련하고 뜨거워서 현실적이다. 이별을 마무리하지 못한 채, 서로의 체온을 기억 속에 붙잡아 두려 애쓴다. 그 모순의 온도는 너무나 인간적이라 냉정한 몸짓 하나로 식지 않는다.

영화를 보며 깨달았다. 내가 그녀에게 던졌던 말들은 사실 ‘미련’의 다른 형태였다. 누군가를 사랑했다는 사실이 남긴 온도를 견디지 못해 나는 차가운 말을 택했고, 그들은 따뜻한 거짓말로 버텼다. 결국 우리 모두는 남은 열을 어떻게든 감당하려던 불완전한 인간이었을 뿐이다. 나의 이별이 불씨에 기름을 뿌리는 방화였다면, 그들의 이별은 손을 데어가며 불씨를 모른 척 손에 쥐는 미련이었다. 나는 사랑을 부정함으로써 다음 계절로 넘어가려 했고, 그들은 사랑을 연장함으로써 현재에 머물렀다. 결국 둘 다, 이별의 계절을 통과하지 못한 것이다.

이 영화는 사랑의 성숙이란 감정을 눌러두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의 진실을 끝까지 바라보는 일이라고 말한다. 진짜 어른의 이별은 ‘쿨함’이 아니라 ‘정직함’으로 완성된다. 슬프면 슬퍼하고, 아프면 아파해야 한다. 그 아픔의 원인을 누구 탓으로 돌리지 않고 그저 한때 뜨거웠던 두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만 남겨두는 것.

가을의 마지막 바람이 불 때마다 나는 그 시절의 대사들을 떠올린다. 내가 그녀에게 남긴 말, 그녀가 내게 건넨 침묵. 그 모든 것들이 여전히 내 안의 한 계절로 남아 있다. 사랑은 끝나도 그 온도는 사라지지 않는다.

만약 또다시 누군가와 이별을 맞이하게 된다면 이번에는 위악적인 말 대신 조용히 말하고 싶다.


“고마웠어. 네가 내 시간의 일부였다는 게.”

그 말이야말로 내가 뒤늦게 배운 ‘어른의 문장’이다. 사랑의 잔열을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야말로 ‘멜로드라마’가 아닌 ‘리얼리즘’으로 이별을 마주하는 가장 뜨거운 방법이다. 그리고 그것이 한 편의 영화가 내 부끄러운 과거에 남긴 가장 다정한 변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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