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트 미션 The Mule
개요 드라마 미국 116분
개봉 2019년 03월 14일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 Clint Eastwood
1. Opening 오프닝
이 영화는 화려한 백합이 햇빛을 머금은 채 아름답게 터져 나오는 정원에서 조용히 시작한다. 그 빛의 중심에 서 있는 주인공 얼 스톤(클린트 이스트우드)은 세월의 비바람을 정면으로 맞서온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고집스러운 품격을 지닌 은발의 노신사이다. 전국 백합경연대회 금메달이라는 이력은 그의 직업에 대한 자부심과 헌신을 웅변한다. 잘 재단된 수트와 재치 있는 농담 하나로도 주변 공기를 부드럽게 휘어잡던 그는 누구보다 바깥 세계에서 반짝이는 별이었다. 그러나 그 화려한 왕국의 내부에는 오래전부터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균열이 스며 있었다. 그는 바깥세상에서는 환호와 박수를 받는 인물이지만, 정작 가장 가까워야 할 가족 앞에서는 번번이 등을 돌린 죄인이었다. 딸의 졸업식과 결혼식, 그리고 숫자를 셀 필요도 없을 만큼 많은 생일과 기념일들은 그의 달력에서 늘 지워져 있었다. 그의 세계에서 일은 자신의 존재의 증명이자 빛이었지만 가족이라는 울타리는 언제든 미뤄도 되는 사소한 비문처럼 취급되었다.
12년 후, 그의 삶은 걷잡을 수 없이 달라진다. 세상은 인터넷이라는 파도를 타고 완전히 새로운 질서로 재편된다. 백합은 여전히 아름답게 피어나지만 그가 정성껏 가꿔온 농장은 시대가 요구하는 잔혹한 효율성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 이렇듯 이 영화의 오프닝은 겉보기엔 흔하디 흔한 실패담의 서두를 연상 시키지만,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이 그리는 세상은 결코 한 노인의 쇠락기로 축약될 수 없는 이야기이다.
이 첫 장면은 한 인간이 평생 쌓아 올린 매력과 성취가 역설적으로 그를 고립과 파산의 벼랑으로 밀어 넣는 시대적 아이러니의 서막이다. 카메라는 바로 그 찬란함과 몰락이 한 지점에서 포개지는 비극적 교차를 노련하고도 담담한 시선으로 포착한다. 얼 스톤의 얼굴에 드리워진 침묵은 곧 이 영화의 정조가 된다. 그것은 단순한 몰락의 그림자가 아니라 오랫동안 외면해 온 삶의 진실이 마침내 자신을 향해 되돌아오는 순간의 뜨거운 숨결이다.
2. 수상한 배달
얼 스톤을 벼랑 끝으로 몰아넣은 경제적 붕괴는 단순한 돈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평생 외면하며 달아났던 ‘사적 파산’의 그림자,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자신이 비워둔 자리의 모든 공백들이 한꺼번에 되돌아오는 잔혹한 청구서였다. 성인이 된 손녀의 부드러운 환대는 잠시 그의 마음을 덥히지만, 딸의 냉정한 눈빛은 오랜 시간 축적된 서러움과 배신감의 침전물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 차가운 태도는 그가 혹시나 잊을 수 있을까 싶어 묻어두었던 죄책감을 거칠게 끌어올리며 관계의 단절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다시금 상기시킨다. 그 무게를 지닌 채 다시 돌아가는 곳은 다름 아닌 그의 낡은 트럭이다. 오래되었지만 단 한 번의 사고도 없고, 단속에 걸린 적도 없는 이 트럭은 그의 삶을 묵묵히 견딘 동반자이자, 인생의 패배 앞에서도 그를 지탱하던 마지막 안정감이다. 그런데 그 순간, 낯선 남자가 다가와 속삭이듯 건네는 말
“운전만 잘하시면 돼요.”
이 유혹은 단순한 일거리가 아니라 무너진 자존감을 복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한 줄기 환상에 가깝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가족드라마의 부드러운 결을 과감히 찢어내고, 범죄 스릴러의 차가운 기류로 몸을 틀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전환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식의 묘한 깊이를 갖는다. 그는 타락의 서사나 악과의 대결 같은 전형적인 장르 공식 대신, 얼의 선택을 ‘공백을 메우려는 몸부림’이라는 지극히 사적인 지점에 놓아둔다. 얼은 정의도, 반항도, 야망도 아닌 오직 ‘뒤늦게라도 가족에게 다가가고 싶은 마음’을 위해 위험을 선택한다. 손녀의 결혼식에 보탤 돈을 마련하고 싶다는 순수한 의도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가장 위험한 일의 문턱으로 이끌어간다.
그 첫 배달은 수상쩍다는 것을 굳이 확인할 필요조차 없었지만, 예상보다 큰 보수는 그의 굳어버린 자존심의 옹이를 다시금 누그러뜨린다. 평생을 일에다 바쳤다는 허무한 자의식의 잔해, 관계를 외면했던 세월의 회한은 노년에도 식지 않은 불씨로 남아 있었고, 그 불씨는 아주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며 다시 불꽃을 피워 올린다. 그래서 그는 결국 평생의 동지였던 낡은 트럭을 처분하고 번쩍이는 새 차를 산다.
이 선택은 단순한 이동 수단의 교체가 아니다. 그것은 그를 지탱해 온 마지막 ‘진실의 흔적’을 스스로 버리고, 일시적인 성공의 환상과 금단의 세계에 한 발 더 깊숙이 들어가겠다는 조용한 맹세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은 바로 이 순간을 집요하게 포착한다. 범죄의 시작을 스릴러적 사건으로 부풀리는 대신, 한 노인의 내면 깊숙한 균열, 결핍과 허영이 빚어낸 필연의 파문으로 기록하며 비극의 문을 차갑고도 뜨겁게 열어젖힌다.
3. 삶의 축제와 노년의 어둠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오래 머문 시선의 끝에는 아흔의 나이에 이르러 뒤늦게 삶의 결산을 치러야 하는 얼 스톤이 서 있다. 그의 여정은 기묘할 만큼 ‘파티’라는 축제의 잔해들을 밟으며 이어진다. 백합 경연대회 이후 열리는 짧고 눈부신 환호의 자리, 오랜 세월 소홀했던 가족의 결혼 피로연, 그리고 멕시코 대형 카르텔의 요란한 연회장까지. 얼은 이들 공간을 자유롭게 오가는 듯 보이지만 실은 묘하게 어울리지 않는 이방인의 걸음으로 서성인다. 어느 순간에는 능청스러운 호스트처럼 환한 미소를 짓다가, 또 다른 순간에는 자신만 들리지 않는 소음을 견디는 외부인처럼 주변의 기류에 밀려난다. 이 파티들은 단순한 흥청거림의 장소가 아니다. 얼이 평생 외면한 관계의 공백을 잠시나마 메꾸는 복원지이자, 그가 너무 늦게 깨달은 온기와 교환해야 할 ‘어둠의 계약서’가 놓여 있는 장소이다. 흥겨운 음악이 고조되고 조명이 화려하게 번쩍일수록 그의 발밑에 드리워진 그림자의 길이는 점점 더 길어지고 검어진다. 얼은 이제 자신이 운반하는 물건의 정체를 더 이상 속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는 그 죄의 대가가 무엇인지 알고 있으며, 이 길의 끝이 환한 축제가 아니라 어떤 파국의 문턱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감지한다.
그러나 모순적이게도 이 축제들은 얼에게 너무 늦게 찾아온 삶의 기쁨이기도 하다. 가족과 함께 보내는 짧은 웃음, 낯선 사람들에게서 느끼는 의외의 호의, 오랫동안 잊고 지낸 인간 사이의 온도는 그에게 삶이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는 착각을 허락한다. 하지만 그 착각의 따뜻함은 오래가지 않는다. 동시에, 거대한 마약 조직의 매뉴얼처럼 움직이는 냉혹한 구조와 내부 깊숙이 뿌리내린 정보원을 통해 조직의 중심을 포착하려는 경찰의 숨 막히는 압박은 얼의 뒤를 집요하게 추격해 온다.
얼 스톤은 이 두 세계의 경계에서 위태로운 춤을 춘다. 한쪽에는 인간적인 온기를 되찾고 싶은 늦은 갈망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비인간적이고 차갑게 계산된 범죄 조직이 있다. 이 춤은 얼이 뒤늦게 발견한 삶의 축복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필연적으로 다가올 결말의 서막이기도 하다. 늦게 피어난 환희와 치명적인 어둠이 서로 얽히며 만들어낸 긴장 속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노년의 삶이 얼마나 뜨겁고 또 얼마나 허망할 수 있는지를 가장 날 선 톤으로 기록해 낸다.
4. 법칙과 배신
이 영화의 특별함은 단순히 노년의 주인공이라는 설정에서 멈추지 않는다. 헌신과 희생 끝에 가족의 가치를 재확인하는 통상적인 가족 드라마의 클리셰나, 어설픈 범죄에 휘말려 쓰디쓴 교훈을 얻는 초보 범죄물의 익숙한 서사는 이 작품에서 과감히 폐기된다. 가족 드라마와 범죄물의 이종교배인 이 영화는 안이한 내러티브 공식을 따르는 대신 그 익숙한 기대를 독특하고 낯선 호흡으로 비틀어낸다. 그 비틀림 속에서 이야기는 통속적인 교훈 대신 생경한 실재감(實在感)을 서서히 획득해 나간다
우선 그는 쫄지 않는다. 멕시코 마약갱단이 총을 들이대도
"이봐 난 전쟁에 참여했던 재향군인이야. 그런 어설픈 짓에 겁먹지 않아."
라 말한다.
그에게 이래라저래라 꽥꽥 소리를 지르는 갱단에게도
"기회가 되면 저 녀석을 쏴버려!"
라고 말한다.
이제 그에게 배달은 일상적인 일이 되었고 점점 배달물량도 커지기 시작했다. 그는 차 안에서 노래를 부르고 모텔에서는 여자를 부르고 배달 중간엔 맛집에 들러 여유를 즐긴다. 그를 감시하는 갱단이 오히려 풋내기에 이방인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특히 갈빗집에서 장면은 이 영화가 품고 있는 독특한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백인들만 즐비한 식당에 어색하고 불편하게 앉아있는 멕시코 인 둘. 이 권력과 시선의 전복. 어떻게 보면 이 영화는 '그랜 토리노'의 리벌스 버전일 수도 있다. 누구나 이방인이 될 수 있지만 위협과 고난은 이방인이 아닌 자신의 내면과 선택에서 온다는 점이 차이점이다. 뒤이어 등장하는 지역 경찰과의 짧은 장면은 영화가 목표로 하는 비판 의식을 더욱 분명히 드러낸다. 백인 경관은 멕시코계 조직원들에게 적대감을 드러내며 검문을 시도하고, 그의 손은 자연스럽게 권총 위로 옮겨간다.
"여기서 뭐 하지? 다시 묻지 않아. 우리 동네엔 무슨 일로 왔지?"
라는 차가운 한마디 속에는 백인 주류 사회의 경직된 구조와 오래된 혐오의 자국이 선명히 드러난다. 이 장면은 타민족에 대한 백인사회의 경직된 태도와 노골적인 혐오를 보여준다. 앞서 타이어가 펑크 난 흑인 부부에게 얼은 서슴없이
" 검둥이(negro)들도 돕고 기분 좋네."
Well, this is good. Helping you Negro folks out.
말한다.
그는 선의와 친절함을 가지고 있지만 백인으로서 그리고 경험 많은 어른으로서의 우월감 또한 가지고 있으며 여전히 낡은 감각을 가지고 있다. 이제는 혐오와 차별의 언어가 되어버린 부모세대에게서 물려받은 언어적 유산. 이 영화가 관심 있는 건 사실 이 범죄로 누가 죽고 누가 잡혀가고 누가 살아남을지가 아닐지 모른다.
결국 이 영화가 집요하게 응시하는 것은 범죄 서사의 결과가 아니다. 오히려 이 영화는 한 시대를 살아낸 노인이 화해하지 못한 가족사와 사회적 편견의 무게를 등에 지고 끝없이 도로를 달리는 모습에 더 큰 의미를 둔다. 텅 빈 트럭의 짐칸보다 더 허전한 그의 내면은 어쩌면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우리에게 남기는 마지막 질문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무엇을 잃은 채 이렇게 늙어가는가? 그리고 그 잃어버린 것들은 결국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가?
5. 교훈과 스타일
-후회와 대가
이 영화는 한 노인의 단순한 회고록이 아니다. 고령의 마약 운반책이라는 설정이 주목받지만, 이 작품이 진정으로 품고 있는 것은 한 가장의 죄책감과 구원에 대한 아주 개인적인 성찰이다. 한 노인의 삶을 관통하는 후회, 그리고 그 끝에 놓여 있는 마지막 질문들을 담담히 꺼내놓는 일종의 고백이다.
이 고백의 마지막에는
“내가 지금 여기 있어. 네 옆에.”(“I’m here now”)
라는 문장이 있다. 얼 스톤이 아내에게 전하는 이 말은 단순한 선언이 아니다. 그것은 ‘부재했던 삶’에 대한 너무나 늦은 보상이다. 다이앤 위스트가 연기한 메리의 거친 숨결과 절절한 고백,
“당신은 내 인생의 사랑이었고 최고의 고통이었어. 그래도 당신이 지금 내 옆에 있어서 다행이야”
라는 그녀의 말은 이 영화의 가장 깊은 정서적 모순을 전한다. 사랑은 상처의 언어와 맞물려 있고, 용서는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긴 시간 동안 치러진 고통의 대가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 자신도 이 영화를 만들며 비슷한 감정을 드러냈다. 공보 기사에 따르면, 그는 얼 스톤이라는 인물에 자신의 삶 일부를 투사했다고 말했다. 노인이 가족보다 일을 우선시해 온 삶, 그리고 그 복귀하려는 고된 발걸음은 감독 자신의 후회와 얼굴을 맞댄다.
또한, Independent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야기는 제 삶의 맥박을 닮았다”라고 고백하며, 장거리 운전이라는 삶의 방식, 마치 길 위에 쌓아온 기억들에 대해 “매우 개인적인 명상”이라고 표현했다.
후회는 언제나 늦고, 선택은 반드시 대가를 치른다. 이 보편적 진리는 영화의 정서를 지배하는 원동력이다. 얼이 마약 운반책으로 살아가면서 겪는 위태로운 임무들은 단순한 범죄 스릴러의 긴장감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가족과의 관계 회복이라는 그의 사적 드라마와 교차하며 감독 특유의 차분하고 절제된 스타일에서 역설적으로 가장 뜨거운 온도를 발산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가족에게 다가가려는 순간마다 바깥 세계의 위협이 더욱 짙어진다. 갱단과의 약속, 지체된 배달, 그리고 수십 통의 부재중 전화. 이 모든 것이 단순한 서스펜스를 넘어선 도덕적 딜레마로 작동한다. 가족을 선택한 그 순간, 치러야 할 외부의 대가는 더욱 가혹해질 수 있다는 숙고는 영화가 장르적 클리셰를 넘어 서스펜스를 구축하는 핵심 축이다. 이러한 서사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 노년기의 독창적 미학을 완성한다. 그의 연출은 감정의 깊이가 깊어질수록 긴장감도 함께 고조되는 구조를 취한다. 범죄물의 속도감과 휴머니즘의 온도가 서로 대립하거나 상충하지 않고, 오히려 서로를 증폭시킨다.
관객은 이 영화의 결말을 단순히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한 인간이 남긴 부재했던 삶의 빚, 가족에게 진 마음의 부채가 어떻게 정리되고, 끝내 용서 또는 화해로 귀결될지를 비극적인 눈으로 마주하게 된다. 에필로그처럼 잔잔하지만 날카로운 이스트우드의 마지막 질문은 우리에게 이런 말을 남긴다.
우리는 결국 무엇을 위해 살았고, 무엇을 남기고 떠나는가?
클린트 이스트우드 열한 번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