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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린트 이스트우드 열 번째!

밀리언 달러 베이비 Million Dollar Baby

by 달빛바람

개요 드라마 미국 133분

개봉 2005.03.10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 Clint Eastwood



1. Opening 오프닝

-상처와 존중에 대하여


​어둠을 가르는 사각의 링. 조명 아래 두 선수의 거친 숨과 땀방울이 부서진다. 한 흑인 복서의 얼굴이 깊은 상처로 붉게 물든다. 코너에서는 절망이 감돈다. 경기를 멈춰야 한다는 신호가 오가지만, 선수는 끝내 물러서지 않는다. 그때, 링 아래 그림자 속에 있던 노인, 프랭키(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링 위로 오른다. 그는 잠시 시간을 멈추고 피를 닦아낸 뒤 익숙하고 무심한 손길로 상처 위에 응혈제를 바른다. 그가 만지는 것은 승리가 아니라 선수의 고통 그 자체이다. ​이 정적과 긴장을 깨고, 낮고 닳은 목소리가 스크린 밖에서 안으로 스며든다.

​“권투엔 존중이란 게 있어. 자기 것을 지키며 상대에게서 그걸 빼앗는 거지.”

​이 목소리는 마치 예언처럼 기능한다. 경기는 믿기 어려운 반전으로 끝난다. 깊은 상처를 입고 패배 직전까지 몰렸던 복서가 기적처럼 승리를 거둔다. 승리를 확신했던 상대는 그 찰나의 방심과 오만의 대가를 치른다. 카메라는 이 격렬한 환희에서 한발 물러서 관중석에서 이 모든 것을 묵묵히 지켜보는 한 여자, 매기(힐러리 스왱크)를 비춘다. 그녀의 시선은 승리한 복서가 아니라 링 밖으로 물러나는 노인의 굽은 등, 프랭키를 향해 집요하게 가닿는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알아본 것이다. 저 노인이 '상처'와 '존중'의 의미를 아는 유일한 사람임을.


​영화는 이 4분 남짓의 오프닝 시퀀스에 앞으로 펼쳐질 모든 이야기의 결, 인물들이 짊어진 시간의 결, 그리고 ‘존중’이라는 단어가 품은 지독한 무게를 압축해 놓는다. 이 영화가 <록키>처럼 화려한 영웅의 신화를 그리는 스포츠 서사가 아님은 이 첫 장면에서부터 분명해진다. 이것은 차라리 링 위에서 어떻게든 버티고 서 있는 자들의 이야기이며 동시에 링 아래로 내려와야 할 때를 아는 자들의 비극에 가깝다. ​프랭키의 철학은 이 영화의 모순적인 심장부를 관통한다.

​“거꾸로인 경우가 많지. 때론 펀치를 날리려면 뒤로 물러서야 하고... 하지만 너무 떨어져선 또 주먹이 닿질 않지.”

​인생이 그러하듯, 복싱 또한 모순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는 행위이다. 프랭키는 단순한 복싱 코치가 아니다. 그는 선수의 근육이 아니라 영혼의 균열을 먼저 읽는 사람이며, 펀치의 속도보다 고통을 감내하는 눈빛을 먼저 살피는 자이다. 그는 선수들을 일시적 영광의 제단으로 소모품처럼 밀어붙이지 않는다. 그가 가르치는 것은 이기는 기술이기 이전에 오히려 '맞는 법'이며, 무너진 후 '버티는 법'이고, 결국 '스스로 일어서는 법'이다.
​그의 낡은 체육관은 그래서 피 냄새 진동하는 전장이 아니라 차라리 삶의 무게를 견디는 방식을 배우는 고해소, 혹은 상처 입은 자들이 기댈 수 있는 작은 교회처럼 보인다. 그리고 프랭키는 그곳의 늙은 사제이다.



2. 매기의 등장


​가죽 냄새와 땀, 쇠붙이가 부딪히는 소리로 가득한 남자들의 성소(聖所). 그 익숙한 리듬을 깨는 이질적인 소리가 파고든다. 한 여자가 묵묵히 샌드백을 두드린다. 주먹이 닿을 때마다 둔탁한 공기의 파열음이 울린다. 체육관의 늙은 파수꾼, 애디(모건 프리먼)의 시선이 그곳에 멈춘다.

​“저 소녀는 누구야?”
-“제기랄.”
“서둘러. 저렇게 치다간 손목이 나갈 거야.”

​그녀의 이름은 매기(힐러리 스왱크). 오프닝에서 프랭키의 뒷모습을 응시하던 바로 그 여자이다. 체구는 여위었지만 그녀의 눈빛은 이미 너무 많은 것을 견뎌낸 자의 것이다. 어깨에는 살아온 날들의 그늘이 묵직하게 내려앉아 있다.

​“난 여자는 안 가르쳐. 딴 데 가서 알아봐.”

​“보스.”

​그 한마디에 실린 절박한 신뢰가 링의 쇠파이프처럼 냉랭하던 체육관의 공기를 가른다. 그녀의 삶 자체가 이미 가난과 결핍이라는 링 위에서 벌어지는 고독한 시합이다. 낡은 식당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하며 그녀는 손님이 남긴 음식으로 허기를 때우고, 텅 빈 냉장고와 TV조차 없는 방으로 돌아온다. 그럼에도 매일 향하는 체육관은 그녀의 유일한 도피처이자 전장이다. 낡은 운동복과 손에 감은 천이 전부인 채, 오직 주먹 하나로 세상과 맞선다. ​매기에게 복싱은 부나 명예를 향한 욕망이 아니다. 그것은 버려지고 무시당하며 이름조차 희미했던 자신이 이 세계에 온전히 발을 딛고 '있음'을 증명하는 유일한 방식이다. 단 한 번이라도, 쓰러지지 않는 존재로 기억되고 싶은 절박한 투쟁이다.



3. 첫 번째 규칙: 자신을 보호할 것


​프랭키가 가르치는 복싱의 제1 원칙은 기술이 아니라 생존이다.

​“첫 번째 규칙은 이거야 ‘너 자신을 보호해라.’”

​이것은 단순히 턱을 감싸고 가드(guard)를 올리라는 기술적 조언이 아니다. 삶에서도, 관계에서도, 그리고 거대한 절망 앞에서도 너무 쉽게 자신을 내주지 말라는, 링 밖의 세계를 향한 가르침이다. 매기는 나날이 강해지지만 방심하는 찰나 여지없이 상대의 주먹을 허용한다. 그 모습을 보는 프랭키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은 그가 이미 한 선수의 시력을 영원히 잃게 만든 과거의 트라우마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절박한 생존의 무게를 배우 힐러리 스웽크는 온몸으로 실존하게 한다. 그녀는 실제 복서의 어깨와 팔선을 만들기 위해 혹독하게 몸을 단련했다. 2005년 CBS '60 Minutes II' 인터뷰에서 "하루에 210그램의 단백질을 섭취해야 했고... 한 시간 반마다 먹어야 했다."(출처:/ CBS News, 2005. 1. 11.)고 밝혔듯, 그 과정은 수행에 가까웠다.
​그녀가 뻗는 주먹에는 체중이 정확히 실리고, 그 눈빛에는 맞더라도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인생의 결기가 담겨 있다. 스웽크는 2005년 '타임'지와의 인터뷰에서 매기라는 인물을 이렇게 설명한다. "그녀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 가족도, 교육도... 그녀에게는 이 하나의 꿈이 있을 뿐이다." (출처: TIME Magazine, 2005. 2. 20.)


​이 절박함은 스웽크 자신의 삶과도 정직하게 포개진다. 2005년, 이 영화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남긴 소감은 매기의 목소리이기도 했다. "저는 단지 꿈이 있던 트레일러 파크의 소녀일 뿐입니다." (I'm just a girl from a trailer park who had a dream.) (출처: 제77회 아카데미 시상식 수상 소감, 2005. 2. 27.)


힐러리 ​스웽크는 <소년은 울지 않는다>(2000)에서처럼 언제나 경계 밖의 존재, 세상의 잔혹한 시선 앞에 선 위태로운 영혼을 연기해 왔다. 이 영화에서 감정의 도화선이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면, 그 불꽃이 닿아 폭발하는 화약고는 단연 힐러리 스웽크이다. 그녀의 주먹은 슬픔을 두드리고, 그 눈빛은 스승조차 외면했던 인간의 존엄을 길어 올린다.



​4. 가족이라는 멍에, 혹은 지옥


​서른두 번째 생일. 매기는 스스로에게 펀치 볼을 선물한다. 그것은 축하의 의식이 아니라, 더는 물러설 곳이 없다는 비장한 결의에 가깝다. 자신을 제자로 받아주지 않는 프랭키 앞에서, 그녀는 처음으로 애원이 아닌 진실을, 눈물이 아닌 고백을 터뜨린다.

​“이걸 치면 칠수록 제 주제를 알 것 같아요. 제 오빤 감옥에 있고 여동생은 양육비 뜯으려고 정부를 속이고 아빤 돌아가셨고 엄만 140킬로나 나가요....... 차라리 저라도 정신 차리고 집에 돌아가 쿠키라도 구워야 하겠죠.”

​이 고백은 그녀가 벗어나려 발버둥 치는 '가족'이라는 멍에의 적나라한 실체이다. 때로 혈연은 가장 질기고 잔인한 속박이 되며, 가장 안전해야 할 울타리는 숨통을 조이는 지옥이 된다. 매기의 가족은 정확히 그런 지옥도(地獄圖)이다. 그들은 매기의 성취와 노력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담보물 정도로만 취급한다. 그녀의 피와 땀을 게걸스럽게 빨아먹고도, 정작 그녀의 상처나 존엄에는 단 한순간도 시선을 주지 않는다. 인생을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것은 거대한 외부의 충격이 아니라, 이처럼 가장 가까운 이들이 일상적으로 가하는 모욕과 착취이다.


​이 지점에서 매기의 상처는 프랭키의 상처와 공명한다. 프랭키에게도 가족은 죄의식의 다른 이름이다. 그는 매번 '반송(Return to Sender)' 도장이 찍혀 돌아올 것을 알면서도 딸에게 편지를 쓴다. 그것은 부정당한 아버지의 자책이며, 결코 수신인에게 닿지 못하는 고해성사이다. 이 공허한 의식은 어쩌면 매기라는 존재를 향한 예고된 연민이었을지도 모른다. 가족에게 버림받은 여자와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은 남자는 서로의 절망을 통해 '사랑'이라는 이름이 요구하는 가장 무거운 책임을 떠올리기 시작한다.



5. 신의 침묵, 인간의 손


​프랭키는 매주 낡은 교회의 고해소에 앉는다. 그가 신을 찾는 것은 경건한 믿음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신에게 따져 묻기 위해 그곳을 찾는다. 그는 어린 신부에게 교리나 성서의 언어로는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 자신이 목격해 온 삶의 부조리와 잔인함에 대해 묻는다. 그것은 조롱이나 신성모독이 아니라 수십 년간 링 위에서 피와 상처를 닦아낸 자가 던지는 가장 정직하고도 해답 없는 질문이다.
​그리고 영화는 프랭키의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도 하듯 가장 참혹한 방식으로 그 부조리의 정점을 스크린 위에 현현시킨다. 비극은 신의 존재를 의심하게 할 만큼 가장 정확하고 잔혹한 타이밍에 강림한다. 모든 것을 성취한 바로 그 순간, 모든 것이 무너진다. 이 추락은 우연이라 하기엔 너무 정교한 악의를 품고 있으며 신의 계획이라 믿기엔 너무나 비정하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이 거대한 불합리와 고통의 원인을 신의 영역으로 떠넘기며 값싼 위로를 구하지 않는다. 대신, 그 거대한 폐허 속에서 인간이 감당해야 할 선택의 무게, 그 마지막 존엄의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링 위에서 빛나던 육체가 속절없이 무너진 매기에게, '그날 경기를 하지 않았더라면' 같은 뼈저린 후회나 '왜 나에게 이런 일이'라는 분노는 이제 무의미하다. 그 모든 감정의 폭풍이 잦아들고 난 자리에는 오직 견딜 수 없는 무력감과 '어떻게 끝낼 것인가'라는 마지막 질문만이 남는다.


​프랭키는 스승이자 유사 아버지로서, 그 질문에 대신 답해야 할 가장 무거운 책임을 떠안는다. 매기는 결국 그에게 마지막 부탁을 한다. 그는 “꿈도 꾸지 마!”라며 단호히 거절하지만 그의 눈빛은 이미 신앙의 계율과 한 인간에 대한 사랑 사이에서 격렬하게 요동친다. 이 작품은 결국 신의 거대한 침묵 속에서 신의 손길이 아니라 가장 고통스럽고 사랑하는 인간의 손길이 한 생의 마지막 존엄을 완성하는 지독하고 숭고한 이야기이다.



6. 그리고 모건 프리먼

-이야기의 양심


​이 영화는 음악보다 목소리가 더 깊이 각인되는 드문 작품이다. 모건 프리먼의 낮고 닳은 듯한 음성은 오래된 나무의 결을 닮았다. 그 목소리는 감정을 강요하거나 밀어붙이지 않는다. 대신, 상처와 시간, 그리고 인간이라는 존재의 한계를 그저 묵묵히 감싸 안는다.


​그의 내레이션이 시작되는 순간, 이 영화는 신의 엄격한 설교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을 곁에서 지켜본 한 인간의 고백이 된다. 그의 말투는 지극히 담담하지만, 바로 그 담담함이야말로 이 지독한 이야기가 가진 진실의 온도이다. 그는 희망을 직접 말하지 않으면서 희망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절망을 낱낱이 설명하지 않으면서도 그 바닥의 깊이를 남김없이 전한다.


​이 영화가 끔찍한 비극을 정면으로 다루면서도 끝내 냉소주의로 추락하지 않는다면, 그건 전적으로 모건 프리먼의 목소리가 관객에게 건네는 인간의 품위와 신뢰에 빚지고 있다. 그는 단순한 화자(narrator)가 아니라 이 모든 기억의 증인이자 이야기의 양심 그 자체이다. ​그의 내레이션에는 극 중 애디로서 프랭키와 매기를 바라보는 시선이 고스란히 스며있다. 그것은 판단 대신 연민을, 절망 대신 품격을 담은 시선이다. 또한 ​그의 목소리는 프랭키가 삼켜버린 침묵을 대신하고, 매기의 가빠지는 숨결을 이어주는 마지막 온기이다. 결코 과장하지 않는 한 음절, 한 음절이 스크린을 울릴 때, 그것은 차라리 기도처럼 들린다.



7. 스타일: 침묵과 존엄의 시선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침묵으로 이야기하는 감독이다. 그의 카메라는 장식을 거부하고 그 극단적인 절제 속에서 인간의 존엄을 길어 올린다. 화려한 앵글이나 감정의 폭발 대신, 인물의 눈빛과 숨소리를 느린 호흡으로 오래도록 응시한다. 그는 배우에게 '연기'가 아닌 '존재' 그 자체를 요구한다.


​그의 연출 철학은 2005년 NPR 'Fresh Air' 인터뷰에서 명료하게 드러난다. "배우들이 덜 생각할수록 좋다고 느낀다... 그냥 그 사람이 되어라... 많은 분석에 빠지지 말라." (I just feel that the less... the actors have to think about, the better... Just be the person... and don't get into a lot of analysis.) (출처: NPR, 'Fresh Air', 2005. 1. 25.) 그렇기에 이 영화는 눈물보다 침묵이 더 큰 무게를 지니며 그 절제가 오히려 더 깊은 울림을 만든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카메라는 언제나 인간의 '마지막 선택'을 비춘다. 그는 비극을 손쉬운 구원으로 덮지 않고, 고통의 맨얼굴을 끝까지 바라보게 한다. 영화의 무거운 주제에 대한 비판에 대해, 그는 2005년 CBS '60 Minutes'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정치가나 설교자가 아니다. 나는 이야기꾼이다." (I'm not a politician. I'm not a preacher. I'm a storyteller.) (출처: CBS News, '60 Minutes', 2005. 2. 13.)라고 선을 그으며, 그저 스토리를 정면으로 응시할 뿐임을 분명히 했다.


​그의 시선에는 냉정함과 온기가 공존한다. 그가 만든 세계는 잔혹하지만, 패배 속에서도 끝내 품위를 지키는 인물들로 인해 절망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거칠지만 고요하고, 비극적이지만 인간적인, 감독 자신을 가장 닮은 영화이다. 74세의 나이로 감독상을 수상하며 "저는 아직 아이입니다. 아직 할 일이 많습니다." (I'm just a kid. I've got a lot of stuff to do yet.) (출처: 제77회 아카데미 시상식 감독상 수상 소감, 2005. 2. 27.)라고 말했듯, 그는 신의 대답이 아닌 인간의 손과 선택을 믿는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언제나 그렇게 패배한 자들, 상처 입은 자들, 그러나 끝내 존엄을 잃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헌사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열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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