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 단팥 인생이야기
개요 드라마 일본 113분
개봉 2015년 09월 10일
감독 가와세 나오미 河瀬直美
1. 벚꽃 아래, 타인의 고통을 껴안는 달콤한 위로
봄은 언제나 잔인할 만큼 찬란하게 온다. 화면 가득 흐드러지게 핀 벚꽃이 바람에 몸을 뒤채며 흩날리는 계절, 영화 속 카메라는 그 눈부신 풍광 아래 자리한 작고 허름한 도라야끼 가게로 시선을 옮긴다. 가게의 주인인 중년 남성 센타로는 묵묵히 팥소를 넣어 빵을 구워낸다. 그의 손길은 숙련되어 있지만 어딘가 건조하고, 표정에는 삶의 생기가 거세된 듯한 권태와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그는 단팥빵을 팔지만 정작 단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뿐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삶이 내는 맛을 느끼지 못한 채 그저 하루하루 견디고 있다. 가게를 찾는 주된 손님인 여중생들의 재잘거림은 이 적막한 공간에 잠시 생기를 불어넣는다. 소녀들의 짓궂은 농담에도 센타로는 좀처럼 곁을 내주지 않는다. 무뚝뚝하게 그만 가라고 등을 떠밀지만 우리는 그의 투박한 행동 이면에 숨겨진 미세한 온기를 감지할 수 있다. 상품 가치가 떨어져 팔지 못하는 실패작을 챙겨두었다가 형편이 어려운 학생에게 슬며시 건네는 그의 손은 그가 세상과 단절된 듯 보여도 실은 누구보다 타인의 결핍을 예민하게 감지해 내는 사람임을 증명한다.
그러던 어느 날, 이 고요한 정체 속에 파문을 일으키는 존재가 등장한다. 바람에 실려 온 꽃잎처럼 불쑥 나타난 도쿠에 할머니는 떨리는 목소리로 아르바이트를 하고 싶다고 청한다. 일흔여섯이라는 나이는 노동 시장에서 환영받지 못할 숫자이지만 그녀는 당당하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든다. 센타로는 일이 고되다며 그녀를 만류하고 대신 도라야끼 하나를 건넨다. 거절의 의사표시였으나 도쿠에에게 그것은 거절이 아닌 일종의 초대장이 된다. 그녀는 싱긋 웃으며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진다.
영화의 도입부는 봄날의 벚꽃이라는 압도적인 시각적 아름다움과 그 아래서 살아가는 인간 군상의 모습을 대조적으로 배치한다. 생의 절정을 구가하는 여중생들의 웃음소리와 생의 황혼에 접어든 도쿠에의 미소는 묘한 대구를 이룬다. 벚꽃은 찰나에 피었다 지기에 더욱 애틋한 청춘의 은유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수없이 많은 봄을 보내고 이제는 지는 법을 배우고 있는 노년의 정한을 품고 있기도 하다.
센타로의 가게는 단순히 빵을 파는 곳이 아니라 각자의 사연을 가진 외로운 영혼들이 잠시 머물다 가는 정거장과도 같다. 도쿠에 할머니가 가져온 것은 단순한 노동력이 아니라 센타로가 잃어버렸던 삶에 대한 감각과 진심을 다해 무언가를 만드는 기쁨일 것이다. 낯선 할머니의 방문은 센타로의 굳게 닫힌 마음에 균열을 내고 그 틈으로 따스한 햇살이 스며들기 시작한다.
가와세 나오미 감독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 예컨대 바람의 결이나 햇살의 온도, 그리고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에 고인 슬픔을 포착해 내는 데 탁월한 재능을 지닌 연출가이다. 영화는 도라야끼라는 소박한 음식을 매개로 하여 상처 입은 사람들이 서로를 어떻게 위로하고 구원하는지를 조용히 그러나 뜨겁게 응시한다. 벚꽃이 지고 난 자리에 푸른 잎이 돋아나듯, 이들의 만남은 서로의 인생에 새로운 계절을 불러올 것임을 우리는 직감한다. 그것은 달콤한 팥소처럼 뭉근하고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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