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와서 외로울 때 항상 친구가 없다고 투덜거렸다. 한국에서 중국인 친구를 찾기가 어려운 만큼 한국어를 아직 유창하게 말하지 못한 나에게는 한국인 친구도 만들기 쉽지 못했다. 사실 한국에 와서 친구를 만들지 못했던 이유를 한국 학생에게 중국어를 가르치면서 겨우 깨달았다.
몇 년 전 나는 여러 학생을 데리고 중국어 말하기 대회에 참석해 본 적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대회 우승자인 초등 6학년 남자 학생이 무대에 올라와 상을 받으며 사회자의 질문에 대답한 것이 있었는데, 그 장면이 아직 머리속에 생생하다.
“중국에 사는 동안 친구 몇 명을 사귀었어요?”
사회자가 묻자마자, 그 학생이 일부러 소리를 높여 중국어로 백 명 넘어 있다고 대답했다. 방금까지 조용하던 관중석에서 여기저기 학생들, 학부모들과 선생님들이 수근거리기 시작했다. 흥미로운 표정을 지은 사회자가 학생을 향해 한 번 더 물었다.
“친구가 이렇게 많아요?”
그 학생은 확신 있는 눈빛으로 “네”라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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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중석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나는 다른 사람과 달리 오히려 그 친구의 마음을 이해했다. 왜냐하면 한국 아이에게는 자신과 함께 공부하는 동갑을 다 ‘친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초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년마다 반을 바꿔야 한다. 학년을 올라갈 때마다 친구 수가 배로 증가한다. 이뿐만 아니라, 같은 학원에 다니는 또래, 놀이터에서 사귀는 또래, 부모님의 친구의 자녀 등등, 모두 다 친구라고 부른다. 그래서 6학년 남학생에게 친구가 백 명 정도가 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같은 학교 내에서 함께 공부하는 아이를 “동무/학우”라고 부르고 학교 밖에서 만나는 아이를 “친구”라고 한다. 나중에 성인 될 때도 아는 사람을 “동무/학우”와 “친구”로 나눠서 다른 사람에게 소개할 것이다. 그것은 중국과 한국 간에 친구라는 정의에 첫 번째 다른 점이다.
두 번째 다른 점은 바로 나이의 차이다. 어느 날 수업 시간에 학생에게 한 어린아이가 노인에게 쓴 편지를 읽어줬다. 그리고 두 사람이 친구 사이라는 말까지 더불어 알려주었다. 나의 말은 순식간에 교실 안에 맴돌고 있는 졸린 분위기를 깨 버리고, 학생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거들며 떠들기 시작했다.
“할아버지와 손자가 어떻게 친구가 될 수 있지, 정말 이상하다.”
“그러면, 할아버지에게 반말해도 되는 거야?”
학생들은 또래가 아닌 사람들과 어떻게 친구가 될 수 있는지를 받아들이기가 힘든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중국에서 정말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심지어 좋은 부모가 되려면 먼저 자녀와 친구가 되라는 말도 자주 들었다. 중국에서 친구가 되는 것은 상대를 존경할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상대와 자신의 마음이 통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서로의 나이에 대해 신경을 덜 쓰고 생각이 잘 맞는지 아닌지를 우선 확인하려고 한다.
중국에는 유명한 문구가 있었다.
“벗이 멀리서 찾아주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有朋友自远方来,不易乐乎。)
이 문장을 보면 친구가 되는 것은 물리학상의 거리와 상관없이 마음의 거리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로의 마음이 통하면 둘이 어디에 있던지 상관없이, 또 자주 만나든 못 만나든 횟수와 상관없이 서로를 친구로 여길 수 있다는 것이다.
친구가 몇 명 있냐고 물어본다면 어떤 이는 친구가 없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친구가 많다고 대답한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친구에 대한 정의가 다르기 때문이었다. 사교적인 사람은 도서관에 우연히 알게 되어 말 몇 마디를 주고받았더라도 바로 자기의 친구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소심한 사람은 아무리 밥도 같이 먹고 대화도 몇 번 나눴어도 단지 아는 사람으로 여길 수 있다.
몇 년 전 어떤 한국분이 나에게 한국에서 생활이 어떠냐고 물어봤다. 친구가 없어서 너무 외롭다는 나의 대답을 듣고 그분은 자신이 친구가 되어 주겠다고 말했다. 그때 그 말은 아마도 나를 위로해 주려고 했던 말인 것 같다. 실제로 친구가 되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마음을 열기 위해서는 먼저 자주 만난 거나 자기의 솔직한 생각들을 공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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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요즘 누구나 바쁘게 사는 세상에서 시간을 내는 것은 좀처럼 쉽지 않을 것이다. 직장, 가족, 취미 활동의 시간을 모두 쏟고 있어서, 누구를 만나기 위해 여유롭게 시간을 내기가 어렵다. 또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상대를 대할 때 그 상대의 가치에 따라 시간을 쓰는 것 또한 따져 보는 것 같다. 상대가 자신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사람인지를 판단하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도움이 되거나 공짜로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다고 판단 될 때 그제서야 만나려고 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누구를 만나는 것이 자신의 귀중한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중국 SNS에서 4년 동안 알아 오던 친구를 내가 잠깐 중국을 방문하는 동안 직접 만나게 되었다. 그 친구는 나보다 열 몇 살 더 어리며, 새벽 6시에 집에서 나와 어둡던 겨울 새벽에 60킬로미터 거리를 구불구불한 산길을 넘어가며 그렇게 혼자 차를 운전한 후 고속 열차를 3시간이나 타고 아침도 거른 채 내가 있는 도시로 달려왔다. 커다랗고 북적거리는 기차역에서 몇 바퀴 돌다가 드디어 서로를 찾았던 우리는 마치 국경을 넘어 지역을 넘어 오랜만에 만나는 이산가족처럼 눈물을 글썽인 채 서로를 껴안게 되었다. 우리는 지금 말고는 언제 또다시 만날 수 있을까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오랫동안 만나던 일반 친구들처럼 5시간 동안 밥도 같이 먹고 쇼핑도 하고, 이야기도 많이 나눴다. 이후 친구를 기차역까지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에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나라면 이 친구처럼 돈과 시간을 기꺼이 지불해 가면서 누군가를 만나러 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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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친구가 없다는 것은 어쩌면 내가 시간을 내기를 꺼리는지도 모른다. 친구라는 존재는 내가 기다리는 대상이 아니라 내가 찾아가야 할 대상이다. 친구는 내가 무슨 이익을 얻으려는 대상이 아니라 내가 그를 위해 기꺼이 무엇인가 내줄 수 있는 대상이다. 이렇게 나를 위하기보다 상대를 위해서 자주 찾고 만나면서 우정은 점점 쌓여 갈 것이다.
요즘에는 사람들이 “인간”이 아닌 동물들을 친구로 삼기도 한다. 왜냐하면 마음이 너무 외로워서 사람을 만나는 것이 쉽지 않아서 반려동물이라도 옆에 두고 살면 행복해질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동물이나 식물이 친구가 되는 것도 좋지만 사람은 그래도 사람과 대화하고 마음을 나눠야 하는 것 같다. 누군가와의 만남으로 때로는 상처를 받을 수도 있지만, 또 다른 누군가와 만남을 통해 같이 맛있는 것도 먹고 여행도 하고, 대화도 나누다 보면 역시 친구가 있어서 힘든 인생에 위로와 위안을 받게 됨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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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향해 마음이 열리면 우리도 공자처럼 친구를 맞이하는 “즐거움” 락(乐)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